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노숙자 출신 거리의 화가 김정일 화백 본문

2022년 2월 26일 오후 4시. 통영 동피랑 동포루 아래 계단 옆 공간에서 두툼한 작업복 차림에 베레모를 쓴 중년의 사나이가 중년 부부의 캐리커츄어를 그리고 있다. 연필로 얼굴을 그린 후 파스텔을 천에 묻혀 컬러로 변색시킨다. 1만 5천 원을 사례로 받는다. 부산서 왔다는 부부는 만족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동피랑 화가’라 부르는 김정일1955~ 화백과의 첫 대면이었다. 사람들 인물화는 그의 생계 수단이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가 즐겨 그리는 대상은 바다이다. 동피랑 아래 강구안 바닷가나 미수동 집 근처 바닷가에서 바다를 화폭에 담는다. 그림에 몰입하는 그의 모습에서 거리의 삶을 살던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1999년부터 속초 보령 부산 목포 충주 등을 노숙자로 전전하다 2010년 통영에 정착한 사람이다. 그를 주저앉힌 건 통영의 편안함이었다. 자신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풍경 때문에 떠돌이 삶을 접었다. 2009년에 통영으로 흘러왔다가 통영의 바다를 보고 “너무 아름다워”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해를 넘기면서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바다도 바다였지만, 고기잡이 배들에 더 매료됐다.
“배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동네에서 살자.”

강구안 화장실 부근에서 새우잠을 자던 그에게 통영시가 빈집을 내어주었다. ‘동피랑’ 마을 ‘레지던시’였다. ‘동피랑’은 중앙시장 뒤쪽 동호동에 위치해 있다. ‘동쪽 벼랑’이라는 뜻으로서 그 이름이 시사하듯 산동네 가난한 마을이다. ‘레지던시Residency’는 ‘주거지’라는 뜻으로 통영시에서 운영하는 창작 공간을 일컫는다. 소설가 강석경, 시인 이제하, 시인 강제윤 등이 머무르며 작업을 했다. 완전 무상은 아니고 1년에 68만 원의 집세를 내야 한다. 기간도 제한을 두지만, 그는 특별히 10년을 거주하다 2021년 독립했다. ‘레지던시’에 살던 시절을 그는 지금도 행복하게 회상한다.
“‘저의 행성’이었어요. ‘나의 별’이었죠.”
그의 별에서는 강구안과 고기잡이 배들, 미륵산, 동포루 전망대가 조망됐다. 그는 이곳에서 하염없이 풍경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 모습은 지구라는 행성에 내려 꽃이 피어 있는 언덕 위에서 하늘의 달과 별을 쳐다보는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닮았다. 전에 살던 ‘레지던시’ 벽에도 직접 그린 ‘어린 왕자’가 가족처럼 서 있었다. 동피랑에 거처를 두면서 그의 행성은 커지고 넓어졌다. 이제는 동피랑 마을 전체가 그의 행성이 되었다. 그 행성에는 구멍가게 주인도 있고, 커피집 사장도 있고, 이웃도 있고, 술친구도 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또 하나의 행성을 두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동안 떠돌아다닌 길거리는 그에게 우주 공간처럼 배회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정 붙이지 못하고 조금의 온기도 느낄 수 없었던 우주 공간을 방황하다 비로소 내려앉은 행성, 그 행성이 자기의 안식처가 되었다. 발 뻗고 쉬고 밥 먹고 그림 그리고 잠을 청할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는 자기 별 한켠에 텃밭을 가꾸어 상추를 재배했다. 그 상추는 그의 주요 먹거리였다. ‘피랑이’라 부르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비와 추위와 이슬을 피해 매일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던 떠돌이 시절에 비하면, 자신의 표현대로 “정말 출세한” 셈이었다. 그 축복받은 삶을 그는 늘 감사해한다.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는데 1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9살에 어머니가 개가하시면서 경기도 여주의 외가에서 지내야 했죠. 외조부 호적으로 입적되면서 외삼촌이 형이 됐어요. 소외된 삶이었죠. 여기 와서 동네 사람들과 친해졌는데 이 사람들이 내 친척, 내 형제 같아요. 여기 와서 출세했죠. 정말이지 축복 받았어요.”
그는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이 행성의 ‘어린 왕자’로 자처한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어린 왕자’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동피랑 벽화가 알려지며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전이었다. 모두가 고단한 삶을 살던 시절이었다. 그가 그림 그려 번 푼돈을 갈취하려 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리숙할 정도로 사람 좋은 그는 슬픔 속에서 한동안을 지내야 했다. 오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던 온기를 그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의 심성이 워낙 맑고 착한 덕이었다. 마을의 어부는 잡아온 생선을 갖다 주고, 이웃 아주머니는 김치나 된장을 나누어 주었다. 그도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려 애썼다. 마을 가게에 간판이나 메뉴표를 만들어주고 실내에 그림을 그려 공간을 꾸며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사하며 말하곤 했다.
“그림을 가까이 두고 보면 마음이 절로 따뜻해집니다.”
틈만 나면 간식을 사서 경로당을 찾아 노인들에게 말벗이 돼주기도 한다. 그는 그 노인들에게서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도 가르치며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 물감과 화지를 갖추고 몸만 오면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 주인공이 여우와 친해지기 위해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을 거쳤던 것과 닮은 모습이었다. 동네 주민들과 빈집에서 공동 작업한 벽화는 감탄을 자아낸다. 아마추어들의 솜씨가 맞나, 여겨질 정도이다. 가족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어머니들의 솜씨가 저보다 나아서 정말 놀랐습니다. 감동이 컸어요.”
그는 “마음이 외로울 때면 이 빈집을 찾아 그림을 보며 쓰린 가슴을 달랜다”라고 고백한다.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해 한이 돼버린 따스한 가정의 풍경이 거기 담겨 있는 까닭이다. 통영시가 펼친 도심재생 운동의 일환으로 ‘동피랑 마을 벽화 그리기’가 펼쳐질 때 그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신을 거둬준 통영시와 동피랑 이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가 그린 <천사의 날개>와 초록색 <어린 왕자>는 유명했다. 오랫동안 동피랑의 사진 포인트 명소였다. 2년마다 고쳐 그리는 바람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의 그림 덕에 동피랑 마을은 조금 더 따뜻해졌다.

동피랑 레지던시 거주 시절, 그는 매일 군화를 꿰신고 출근을 했다. 군화끈을 조일 때마다 자신이 씩씩해지는 것 같아 뿌듯해지곤 했다.
“군화를 신으면 젊은 시절이 떠올라 자신감이 생겨 좋습니다.”
그는 군화를 신고 푸르렀던 그 시절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곤 했다. 그의 일터는 집 바로 아래거나 위였다. 때로는 강구안 항구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바다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집 마당에서 강구안을 내려다보며 그리기도 했다. 바닷가로 나가 캔버스에 움직이는 배를 담을 때가 가장 좋았다.
“정지해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배를 더 표현하고 싶어 져요. 그게 왜 그렇게 멋있는지.”
누구나 자기만의 색을 띤다. 김정일 씨의 색은 하양을 쫓아가는 파랑이지 싶다. 그에게 파랑은 슬픔이고 하양은 희망일 터이다. 움직이는 배가 만들어내는 하얀 파도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할 것이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기세 좋게 앞으로 나아가는 멸치잡이 배들에게선 개선장군과 같은 위풍당당을 느낀다. 그 생동감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라고 고백한다.
통영 바다 앞에 서서 그가 두 팔을 활짝 펴고 웃으며 자랑한다.
“나만큼 넓은 화실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씩씩한” 바다를 그리고 나면 ‘레지던시’로 돌아가 상추 네댓 장 뜯어 고추장 쌈밥을 먹거나 라면, 짜장면을 하나 끓여 먹고선 그윽한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곤 했다. 자신에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는 생각에 고맙고 즐거워지던 순간이었다.

통영에서 그는 제법 유명 인사가 되었다. 동피랑은 물론이고 통영 길거리나 서호시장, 중앙시장에서도 사람들은 ‘동피랑 삼촌’이라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의 그림 덕이다. 그가 바다 풍경이나 초상화를 그리고 있으면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 캐리커쳐를 그려 그림 값을 받으면 물감이나 화구를 산다. 쌀이나 라면도 빠지지 않는다. 돈을 모아 집세도 낸다.
2021년 3월과 10월에 경남 거제의 한 카페를 빌려 전시회를 열었다. ‘내 그리운 바다’가 전시회 제목이었다. ‘공공미술 작가’로 소개됐다. 무명 화가인데도 꽤 팔렸다. 전시 그림 23점 가운데 20점이 팔렸다.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한 팬은 10점을 구입했다. 동피랑에 이웃해 사는 시인이자 섬연구소 소장인 강제윤 씨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전시회를 주선해주고 넓은 인맥을 동원하고 자신의 SNS에 김 씨의 그림들을 소개해 판매를 도왔다. 이 전시회는 그의 집 마련을 도우려는 거제 갤러리 카페 ‘수국’의 대표 윤미숙 씨의 기획이었다. 윤 씨는 전시공간도 무상으로 제공하고 갤러리 판매 수수료도 받지 않았다. 윤미숙 씨와의 인연은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노숙 생활을 하던 그에게 동피랑 거처를 주선한 주인공이다. 시민단체 사무국장이면서 통영시의 도심재생 운동을 맡아하던 윤 씨는 김정일 씨를 처음 본 순간 바로 선함과 재능을 읽었다.
“하늘에서 툭 떨어진 맑은 영혼 같았어요. 돕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윤 대표는 그가 동피랑에 소프트랜딩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힘들게 번 돈을 사람들에게 뜯기는 그에게 여동생처럼 질책을 퍼붓기도 했다. 그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어 동피랑 행성에 ‘어린 왕자’가 내려앉을 수 있었다. 김정일 씨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윤미숙 대표와 강제윤 시인을 “직장 상사처럼 대하고 싶다.”라는 말로 감사의 정을 표한다. 그들과의 인연이 있어 한 노숙자가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런 느슨한 끈 같은 이웃이 있어 한 개인이 접시꽃처럼 하늘로 꼿꼿이 자라날 수 있다.

그들 덕에 그림을 팔아 그토록 원하던 방 두 개짜리 22평 아파트를 7,500만 원에 구입했다. 아직 4,500만 원의 대출을 더 갚아나가야 하지만, 그는 무척 행복해 한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처음으로 자기 소유의 공간이 허락된 까닭이다. 동피랑의 ‘레지던시’에 이어 두 번째 맛보는 희열이었다.
미수동의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안은 방, 거실, 베란다 할 것 없이 그림들로 그득했다. 모두가 바다와 배 그림이었다. 얼마나 의욕적으로 그림들을 그려왔는지 알게 해 주었다.
그를 거리로 내 몬 세월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여주에서 농고를 졸업한 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울대 미대에 네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공군서 제대한 후 공무원 시험을 거쳐 체신부에서 일하면서도 미대 진학의 꿈을 놓지 않았다. 미술 학원을 하며 평생을 살고 싶은 게 당시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미술대회에서 수상을 여러 번 해서 자신감도 있었다.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망은 색종이 접기를 잘하셨던 외조모의 피를 물려받은 듯싶었다.
“전봇대 위에서 작업하다가도 내려다보는 부감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하곤 했었어요.”
늘 갖고 다니던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전봇대 위에 매달린 채로 그림을 그리는 김 씨의 모습이 아득히 그려진다. 경이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 그는 결혼을 했고, 작업 시간을 야간으로 바꾸며 서울 예대에 입학했다. 28살 늦깎이로 그렇게 원하던 ‘미대생’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림 실력을 갖추면서 삼각지의 상업미술 회사에 들어가 공동 작업을 했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그림을 대량 생산하던 곳이었다.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 그는 유명화가들의 다양한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1990년 대 후반 들어 전성기를 구가하던 상업미술 시장이 싼 인건비를 앞세운 중국에 넘어가고, 설상가상으로 IMF 사태가 터지면서, 그의 불행이 시작된다. 손을 댔던 주식도 그를 궁지로 몰았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면서 그는 직장에 이어 가정도 잃게 된다. 처가 식구들이 그를 몰아세우면서 이혼을 해야 했고, 아내는 곧 재혼을 했다. 그는 낡은 차 한 대에 그림 도구와 숙식 장비를 실은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기술이 있으니 굶지는 않을 거라 여기고 유랑길에 나섰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애들이 눈에 밟혔으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지금도 그는 중학생이던 둘째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아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남겨주고 싶어 한다.
필자는 김정일 씨가 어렵사리 가정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화목한 가정의 풍경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우한 개인사가 작용한 부분도 있지 않나 여긴다. 1박 2일 간 지켜본 그는 정에 굶주려 있고, 작은 정 한 자락에도 감동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정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피로써 맺어진 부자父子 간의 관계는 서로가 성실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아들은 아들로서의 사랑과 효심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다소 취약한 아버지라 할 지라도 결여된 것보다는 낫다. 1959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필자는 지금도 선친의 애창곡이었다는 ‘산유화’를 부르면 목이 멘다. 한동안은 어디에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을 하며 백일몽을 꾸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둠의 세계에서도 끄집어내 오고 싶었을 만큼 간절한 존재였다. 김정일 씨 부자가 다시 껴안을 수 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하다.
2월 27일 일요일 김정일 씨가 처음으로 ‘땡땡이’를 치고 필자 일행과 함께 연화도로 향했다. 5백 년 전 사명대사가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머물렀던 곳이다. 섬을 덮은 동백들이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날이 좋아 바다는 기막힌 쪽빛을 내주고 있었다. 그는 바다색에 감탄하며 “쉬기를 잘했다”는 말을 연발했다. 같은 행성에 거주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우리는 섬을 일주하며 색다르게 펼쳐지는 풍경들을 함께 음미했다. 필자가 아는 한,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 그늘을 갖고 있으며, 그 그늘에 갇혀 유적流謫의 삶을 살기도 한다. 햇살 좋은 언덕에 앉아 빛 좋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옹색한 영혼이 감사하며 내면의 취약함을 내려놓을 수 있음을 확인하던 날이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그에게 필자는 ‘려해麗海’라는 호를 선물했다.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가 살았던 ‘여주麗州에서 남해南海까지’라는 의미도 담았다.

돌이켜보면, 려해는 그 삶이, 태어난 마산도, 소년 시절을 보낸 여주도, 결혼 생활을 했던 서울도 아닌, 통영 땅에 속한 사람이다. 오직 통영의 시공간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까닭이다. 고통 속에서 우울하게 지내다 정신 착란을 앓던 말년의 빈센트 반 고흐는 갓 태어난 아기의 방에 걸 그림을 한 장 그려달라는 동생 테오의 부탁을 받고, 아를Arles의 봄에 아몬드 나무가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던 풍경을 회상하며 화폭에 담았다. 자신이 유일하게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을 사랑하는 조카에게 주고 싶었던 고흐의 일화에서는 슬픔이 묻어난다. 멸치잡이 배가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김정일의 마음에서도 비애가 감지된다.
오늘도 통영의 풍경을 화지에 옮기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70년 전 이 바닷가를 서성이던 이중섭을 떠올린다. 전쟁을 피해 일본의 처가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진한 그리움에 몸을 떨었던 불행한 천재였다. 항남동 선술집에는 아직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바닷가에 무명의 려해가 화가의 맥을 잇고 있다. 중섭처럼 가족과 떨어진 채인 점도 닮았다.
“제 속에는 이중섭과 박수근, 고흐, 에곤 쉴레 등이 지분을 갖고 있나 봐요.”
네 명 다 치열하게 화가의 삶을 살다 간 맑은 영혼의 천재들이었다. 그들과 영혼의 세계를 공유하는 려해 역시 선한 영혼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루저Loser’로 여기는 삶에서 벗어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김정일 씨에게서 고마움을 느낀다. 아픈 생채기인 채로 남은 아들들과 재회할 수 있다면 더욱 고마울 것이다. 한쪽이 결여된 채로는 구성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화가인 그는 알 터이다.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공허함을 메꿔야 한다. ‘동피랑 화가’가 자신의 인생도 아름답게 채색하며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려해가 아들과 재회하며 파안대소하는 순간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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