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평생을 예술 장르 속에서 살다 – 색소포니스트 이병형 본문


2022년 2월 27일 오후 5시 충청남도 온양 덕산면 ‘비전 TV’ 스튜디오.
색소포니스트 이병형1952~이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듀엣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 김광석의 담백한 기타 반주에 맞춰 이병형의 짙은 색소폰 소리가 춤을 춘다. 음을 줄였다 늘였다, 세기를 강하게 약하게, 호흡을 뱉었다 마셨다, 하며 뿜어내는 소리에 청중은 매료된다. 안다성의 ‘바닷가에서’ 같은 곡은 70 나이에도 딸리지 않는 호흡으로 트렘블링trembling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연주자와 음악과 청중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시간이었다.
2022년 7월 7일 서울 인사동 쌈지길 앞에서 이병형이 김광석, 이중산, 김민웅, 릴리 등 친구들과 함께 버스킹 공연을 벌였다. 7월부터 매주 금 토 일은 버스킹 공연을 하기로 마음 억은 데 따른 것이다. 일류 프로들인 이들 아티스트들의 연주는 담박에 행인들의 눈과 귀를 붙잡았다. 모두들 휴대폰을 꺼내 연주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한 외국인 커플은 CD를 사가며 10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거리 연주지만 여늬 무대 공연처럼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두의 모습이 감동을 주었다. 지나가던 왕년의 가수 장미화 씨도 옛친구들을 만났다며 반갑게 회포를 풀고는 한참을 감상했다.

이병형 김광석 듀오 버스킹 2022.7.7 인사동



장미화 씨와 합영

이병형은 삶 자체가 예술인 사람이다. 어릴 적 노래 부르기서부터 시작된 그의 예술적 인생은 하모니카, 클라리넷, 색소폰을 거쳐 작사 작곡, 음반 제작, 두부, 건축, 인테리어, 가구, 돈가스 순으로 옮겨가며 궤적을 그려왔다. 가위 ‘팔방미인’이다.
2002년 제주도에 음악 카페를 연 것을 비롯해 2022년 5월 1일 조치원에 공연 무대를 갖춘 돈가스 식당을 개업하더니 이어서 강원도 영월 주천강 강변에 두부 전문 식당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모두가 ‘5월의 꽃’이라는 간판을 내걸게 된다. ‘5월의 꽃’에는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이 짙게 배어있다. 44년 전 5월의 신부였던 아내를 지칭하는 까닭이다.

5월 7일 조치원의 ‘5월의 꽃’을 찾았다. 이병형은 셰프 복장을 하고선 주방에서 돼지고기를 기계로 압축해 160도에서 3분 40초 동안 튀겨 돈가스를 만들고 소스와 샐러드, 절임고추 등도 직접 준비하더니 밤 8시부터 40분간 색소폰 연주에 나섰다. 작은 체구의 그가 무게 18kg의 알토 색소폰을 메고 7~8 곡을 연주하는 건 중노동이지만, 연주할 때 그는 가장 행복한 표정이 된다. “하루의 피로를 날려주고도 남는다”라고 말한다. 지척에 있는 홍대와 고대 학생들도 한 번 다녀가면 속절없이 팬이 될 정도로 그의 연주는 음식만큼 맛을 내지만, 이곳에서의 연주는 이웃 주민들이 불편해해 접을 생각이다.
그의 가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16년간 음악 카페를 열었었다. 냉장고에서 필요한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그의 연주를 듣고는 만족한 만큼 돈을 내고 가는 운영방식이 독특했었다. 돈 벌기에 집착하지 않는 그의 인생관이 반영된 영업방식이었다. 제법 소문이 많이 나서 명소로 꼽혔으나 땅 주인이 비워달라고 해 내몰렸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해 서운하기도 했지만 무대를 잃은 허전함이 더 컸다. 부산으로 건너와 해운대 바닷가에서 버스킹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상남도 일대를 사방으로 드라이브하고 다니다 조치원 가게 건물주와 인연이 닿아 조치원 ‘5월의 꽃’ 돈가스 가게를 낳았다.

이병형 씨는 제주도 카페처럼 조치원 가게도 직접 꾸몄다. 2021년 8월부터 혼자 힘으로 공사를 시작한 이 장소를 12월 13일 격려차 처음 방문했을 때, 실내에는 건자재와 공구들로 그득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폐목들 더미였다. 동해와 남해, 서해 등 전국의 바다에서 나무 쓰레기들을 주워 옮겨온 것들이었다. 큰 비에 꺾이고 부러져 산과 계곡에서 바다로 떠밀려온 나무들이었다. 어떻게 쓸려고 하나, 궁금했는데 지은 걸 보니 가게 입구에 그 폐목을 이용해 나무 형상을 만들어 벽에 부조로 심었다. 무대 배경은 초록색 등으로 그린 하트 모양 안에 나무의 가지를 세우고 둥근 단면을 벽에 붙여 별장의 장작더미처럼 보이게 했다. 숲 속 공연장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감각과 손재주가 놀라웠다. 흰색으로 칠한 외관은 순백의 아름다움을 발한다. 원래 건물의 주차장 용도였던 공간이 이병형을 만나 멋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러 곳에 식당을 내고 있지만, 그의 지향점은 음악이다. 음악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식당이나 카페 운영을 겸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를 15년 전 올레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보자마자 “친구 하자”며 이물 없이 굴더니 다짜고짜 한라산 중턱 자신의 음악 카페 ‘5월의 꽃’으로 필자를 끌고 갔다. 거기서 처음 그의 색소폰을 듣고선 놀랐다. ‘슬픈 로라’와 ‘해변의 길손’, '안개 낀 밤의 데이트'La Playa' 등 연주곡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듯했다. 타고난 뮤지션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와닿았다. 구도자가 수행하는 듯한 진지함과 경건함도 읽혔다. 그가 그의 연주에 혼신을 다한다는 게 감지됐다.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진 색소폰은 한라산의 정령들을 깨워 춤을 추게 만든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비한 음색을 뿜어댔다. 알고 보니 그는 70년 대 인기 보컬그룹 ‘사랑과 평화’의 원년 멤버였다.










이병형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운명적으로 예술적 삶을 살게끔 기획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 기획의 시작은 한량 기질이 다분하셨던 아버지였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라는 김삿갓 노래를 즐겨 부르시곤 했는데, 아들은 3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버지는 사진과 영화에 관심이 많아 사진관에 이어 ‘횡성 극장’을 운영하셨다. 스피커를 달고 영화 홍보를 하던 지프차 안에서 어린 아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며 ‘김삿갓’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병형의 재능은 다분히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집안 환경 때문에 자연히 음악에 심취하며 자랐다. ‘김삿갓’ 다음은 하모니카였다. 사촌 누나가 부르던 하모니카 소리에 반해 누나의 하모니카를 훔쳐 몰래 부르곤 했다. 아무도 없는 수수밭 속에 숨어서 가요며 가곡 등을 연주했다. 소리에 민감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는 반증일 터이다.
14살 무렵 그의 음악 재능은 또 한 번의 계기를 맞게 된다. 다름 아닌 학교 밴드부와의 만남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날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밴드부 나팔소리가 귀에 들어와 “밴드부에 들어가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된다. 밴드부에서 그는 클라리넷을 배웠다. 악기를 갖고 놀다시피 하며 2년을 연주하자 온갖 곡의 연주가 가능해졌다. 그의 빼어난 솜씨는 60년 대 선풍적 인기를 구가했던 ‘장소팔 쇼’와 연결된다. 횡성에 와서 공연 중이던 장소팔 씨가 그의 클라리넷 연주를 듣고선 “너는 서울로 와야 한다”라고 부추긴 것이다. 한껏 고무된 이병형은 1966년 밴드부 친구와 둘이서 야반도주에 나섰다. 학교 창고에서 클라리넷을 훔친 채였다. 원주로 나가 서울행 야간열차에 무임승차했는데 역무원이 검표하러 오자 혼자 제천서 내리게 된다. 한 중국식당을 찾아가 “밥만 먹여달라”라고 사정해 며칠 일을 거들었다. 그러던 중에 또 한 번의 운명과 조우한다. 한 시각장애자가 기타를 들고 식당에 들렀는데 이병형이 “나도 클라리넷 분다”며 한 곡 연주했더니 그가 “날 따라가자”라고 제안해 함께 경기도 송탄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기타리스트는 송탄의 유명 유흥업소를 다니면서 반주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기타 치면 옆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최희준1936~2018이 불러 당시 공전의 인기를 얻고 있던 ‘하숙생’을 자주 연주했다.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랫말처럼 그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류긴 하지만 음악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아티스트가 된 듯해 신이 났다. 틈이 나면 ‘한송이 가을꽃에서 나는 다시 그대를 보내’ 같은 노래도 만들었다. 그의 남다른 감성이 작사 작곡을 부른 것이다. 그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보는 많은 인연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임대희 악단장과 우연히 만나 그가 이끌던 테너 색소폰 악단에서 수습생 자격으로 어울렸고, 인천의 위스키 홀 ‘유니온 클럽’ 사장이 클라리넷 연주자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와 수락하며 새로운 세계와 만나기도 했다. 마도로스들을 상대로 연주를 하고 나면 마담이 카우보이 모자를 들고 수금을 해 그의 일당을 벌어주는 식이었다. 후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꾸리게 되는 최희철 봉철 형제와도 만났다. 함께 보컬 그룹을 결성하려 의기투합했고, “알토 색소폰이 필요하다”라는 얘기에 망설이다 횡성으로 가서 부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악기를 장만하려면 거금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17살 때였다. 아버지는 2년 만에 나타난 아들을 보자마자 경찰서로 데리고 가 자수하게 했다. 학교 악기를 훔쳐 달아난 혐의 탓이었다. 이번에는 경찰이 그의 운명을 도왔다. 조서를 쓰면서 이병형의 지난 이야기를 듣더니 “너는 뭘 해도 될 놈이다”라며 악기를 반납하는 선에서 훈방 조치를 해줬다. 함께 도망간 친구는 대구행 열차에 오르는 바람에 서커스 단에 들어가 고생하다 돌아와 중학교를 마친 후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병형은 이렇듯 주변의 도움 덕에 예술 인생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예술에 대한 감각이 있던 아버지가 서울 낙원동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미제 색소폰을 사주셨다.
이병형은 알토 색소폰을 들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7년간 보컬 활동을 했다. 7년 후 유니버설 미 8군 기획사가 그의 소문을 듣고 스카우트하러 왔다. 미군부대에서 활동하려면 8군의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이병형은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 등 쟁쟁한 선배들의 지도 덕에 오디션서 최고점인 ‘A 플러스’를 획득했다. 어린 나이지만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이 출중했다는 이야기이다. 8군에서 5년 정도 공연하다 일반 무대로 진출해 ‘오비스 캐빈’, ‘실버타운’, 그리고 미도파 5층에 있던 고고클럽 등서 연주했다. 이 시기 김정호, 전인권, 한영애 등과 교유하며 영감을 주고받았다. ‘아이돌스’와 ‘영 에잇’ 그룹의 멤버로 뛰며 당시 음악 메카였던 명동을 주름잡고 다니다 ‘사랑과 평화’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10년의 세월이 지나 20대 후반이 되면서 문득 환각제와 환락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됐다. 자기를 둘러싼 테두리를 벗어나 “알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에 어머니를 찾아간다. 재능이 많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낭비벽으로 가세가 기울자 전답을 다 팔아 서울 장위동에 집을 장만하고선 남대문 시장에서 반 평짜리 가게를 마련해 재봉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성경 공부에 전념하다 ‘아시아 레코드’ 회사의 제의를 받고 싱어송라이터로 취직해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황소걸음’과 ‘안개비’ 등 앨범을 냈으나 ‘얼굴 없는 가수’를 고집했다. 서유석이 ‘황소걸음’을 자기에게 달라 요청해오자 흔쾌히 주고, ‘안개비’는 ‘세모와 네모’ 듀엣에게 선물했다. 두 곡 다 노랫말과 멜로디가 출중한 곡으로서 지금도 듣게 되는 유명곡들이다.

그에게는 그 외에도 다른 재능이 숨어있었다. 우연히 그 재능을 알게 된다. 하루는 장충동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생두부를 접하고선 맛에 감동을 받았다. 무슨 두부인지 물었더니 ‘손두분데 장사가 잘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얘기 듣고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평소의 바람이 다시 꿈틀 살아났다. 그 집에서 사흘간 머무르며 간수, 온도, 콩 종류 등 노하우를 익힌 후에 손두부를 제작해 서울 강남에서 히트를 쳤다. 두부장사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게 5년을 보내고 나자 매일 두부만 접하는 게 지겨워졌다. 매너리즘에 빠져 지내는 걸 가장 못 견뎌하는 성격답게 다시 두리번거리다 이번엔 집 짓기에 뛰어든다. 톱, 망치 들고 경기도 판교 대장동에 시골집을 개조해 카페를 만들기 시작했다. 외벽, 창문, 화장실을 고치고 페치카를 넣어 세련된 카페로 만들었다. 가구 장인들을 모셔놓고 제작 모습을 사흘간 지켜보고선 그대로 흉내 내 가구공장도 운영하고 실내 장식도 직접 했다. 경기도 퇴촌과 충청도 천등산 그리고 강원도 주문진 등에서 15년 간 가구 제작과 인테리어 사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일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녔다. 지인들이 푼돈 들고 와서는 우는 소리하며 봉사 요청을 해온 탓에 돈은 만들지 못 한채 재능기부만 한 것이다. 차츰 인테리어에 흥미를 잃으면서 2002년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자” 해서 택한 곳이 제주도였으나 음악 카페를 경영하며 16년을 살던 제주도에서 떠난 이유 역시 그 전 사연과 같았다. 아무리 풍경이 아름다워도 주변 사람이 실망스러우면, 그 풍경을 떠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마음을 주어도 돌아오는 건 씁쓸한 상처뿐인 관계인 까닭이다.
그의 아들들에 대한 자부심은 크다. 세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재능 가운데 하나씩을 물려받았다. 각각 첫째는 음악, 둘째는 음식, 셋째는 장식 일을 한다. 특히 장남 이환은 음악을 들려주며 태교를 한 정성 덕에 아버지 못지않은 음악 재능을 보인다. 건반을 연주하는 그의 재능을 전인권의 ‘들국화’가 바로 알아보고선 영입했을 정도이다. 지금은 독립 녹음실을 운영하며 솔로 재즈 밴드 활동을 한다. ‘시나위’, 조성모 등의 음반 작업에 세션 맨으로 참여하는 등 인정받는 뮤지션의 반열에 올랐다. 장남에게는 늘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무르익은 음악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피력하곤 한다.
2018년 여름 지리산의 친구 집에서 함께 숯불 피워 삼겹살 구워 먹다가 아버지를 좇아 깜짝 방문한 장남과 즉석 협연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색소폰과 건반 연주 사이로 간간이 섞이는 강아지 짖는 소리도 음악의 일부가 되던 순간이었다.
“9월이 내게 오면 그리운 추억도 오네 한 송이 가을 꽃에서 나는 다시 그대를 보네
9월이 나를 떠나면 아쉬운 추억도 가네 귀뚜리 소리 들으며 나는 다시 손짓을 하네”
그는 기타 반주에 맞춰 자작곡을 불러 마당을 일순 애잔함으로 덮고는 “아들, 아들 친구들과 ‘메이 플라워 밴드’를 결성해 따뜻하고 편안한 음악 들려주고 싶다”라고 재다짐했다. 이병형 씨가 자신의 다양한 재능 가운데 인생의 마지막 풍경으로 음악을 선택하려는 것은 그가 타고난 음악인이란 얘기임을 말해준다.
그가 추구하는 장르는 팝 앤 재즈Pop & Jazz, 가곡, 크로스오버Crossover 등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이다. 들으면 잠이 오고 힐링이 되는 그런 음악이다. ‘이프If’, ‘기타 맨’,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가고파’, ‘그네’ 같은 들으면 소름 끼치도록, 눈물 나도록, 사랑스러운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다. 힘든 삶에 에너지를 주고, 지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살아갈 용기를 주는, 힘 있는 음악을 지향한다. 조치원 ‘5월의 꽃’ 한쪽에 무대를 마련해 오늘도 색소폰을 불고 있는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평화의 모습이다.
“음악은 선별해서 들어야 해요. 잘못 선곡하면 삶도 함께 무너져 쉽게 병이 들고, 인성도 버리게 되죠.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나 사람의 행복도 좌우받아요. 음악인이 좋은 영혼을 늘 유지해야 하는 당위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음악인으로 살다 가고 싶습니다.”
이병형의 삶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질량이 없는 존재도 파동wave을 통해 에너지를 갖는다. 갈망의 파동이 현실을 타개할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병형은 음악, 건축, 가구, 음식 등 다방면의 예술적 삶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모두 현실이 되었다. 좋은 심성으로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유지하면 무의식이 나의 잠재 의지를 현실화해준다. 이병형의 경우 그 실현은 우연이나 인연의 모습으로 찾아왔지만, 실은 그의 조용한 의지가 파동을 일으키며 밀어내고 끌어들인 조화인 셈이다.
이병형이 내년 주천강 강변에 마련할 공연장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들과 함께 펼칠 그의 선한 음악이 고적한 강원도의 산속에 울려 퍼지는 광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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