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일기를 쓰듯 그린다" - 아흔의 현역 화백 나희균 선생 본문

"일기를 쓰듯 그린다" - 아흔의 현역 화백 나희균 선생

gubo54 2022. 8. 12. 14:09
728x90

 

 

2022 6월 경기도 장흥의 안상철미술관에서 나희균1932~ 화백의 전시회가 열렸다. 아흔의 노 화백이 여는 전시회라 궁금해 길을 나섰다. ‘음률이라는 주제가 눈길을 끌었다. 물결 모양과 파이프의 나열 같은 유화들이 음악을 개념화하며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음표나 멜로디를 형상화한 것처럼도 보이고, 파이프들이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형상으로도 비친다. 우주의 소리들을 풍경을 묘사하듯이 표현했다. 생각해보면, 음악에 앞서 소리가 있었다. 음악은 그 소리들의 흉내일 것이다. 나 화백의 전시회 주제인 음률은 풍경의 모습을 담아낸다. 외부음의 내면화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표현이다. 세 개 층을 가득 채운 작품들 가운데 두 점에는 특별히 슬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발길을 잡는다. 청색과 보라, 흰색과 녹색 그리고 검정과 회색이 바람에 나부끼는 풀포기의 이미지를 띤다. 모든 흔들리는 것은 울고 있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시인 신경림1935~ 갈대를 흔드는 것은 제 조용한 울음이라며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읊었다. “슬픔의 기억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풍경도 없는 법이다. 나희균 화백에게도 음률은 그런 기억의 소산일까.

 

 

 

시나위라는 부제의 그림들은 초서가 춤을 추는 모습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아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을 사사하기까지 한 어머니 송남松南 배숙경1902~1995의 글씨를 보며 그린 것이다. “제가 초서를 무척 좋아해요. 물 무늬 같지 않아요?”라고 설명한다. 문자도 나희균에게 조형의 요소가 된다.

 

 

 

 

음률 외에 빛과 마음, , 낙엽, 고요, 은하, 레퀴엠을 주제로 한 그림까지 모두가 최근 2~3년 사이에 작업한 것들이다. 모든 주제에서 공통으로 감지되는 것은 생명성이다. 우주의 모습, 생명의 본성, 내면 표출, 외부 확장 등 안과 밖으로 향하는 생명성을 관찰한 궤적이 묻어난다. 아흔에 이른 노 화백의 관이며 감이다.

 

 

 

나희균 선생은 1932년 만주 봉천(지금의 선양審陽)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나경석1890~1959은 도쿄공업대학을 나와 고무, 유리 생산 계통의 일을 했다. 1919년 독립선언서를 만주로 전하려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가 객원 기자와 음악단원 생활을 했다. 나 화백이 음률이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들의 배경이다. 부친은 1921년 서울에 왔다가 개성상인 집안 출신으로서 동아부인상회에 근무하던 배숙경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1924년부터 만주 봉천에 터를 잡았다. 나경석은 조선인의 정착을 돕는 농지개간사업을 하다 1936년부터 고무공장을 운영했다. 1941년 귀국해 농장과 건설회사를 경영했다.

 

나희균은 초기 서양화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나혜석1896~1948의 조카이다. 나혜석은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서도 유학한 엘리트 여성이었으나 시대를 앞서간 삶을 살다 불행하게 생을 마친 인물이다. 나혜석이 1940년 쯤 신교동 오빠의 집에 잠시 와 있을 때 <별장>이라는 작품으로 그린 그 건물을, 9년 후 여고생이던 나희균도 똑같이 그린 사실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 순종비 윤비의 백부였던 윤덕영1873~1940이 프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가져와 1935년에 복제한 건물이었다. 한국전쟁 후 미군장교 숙소,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로 쓰이다가 1973년 도시 정비사업으로 철거됐다. 만여 평 대지에 들어선 6백 평 규모의 크고 화려한 유럽식 건물이라 신교동 집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을 수도 있지만, 고모와 조카가 같은 대상에 마음을 연 것은 화가 DNA가 작용한 걸로 보는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벽수산장

 

나희균은 경기여고에 입학하며 미술반에 들어 방과 후에 목탄으로 석고 데생을 했다. 아그리파나 비너스, 다비드 상을 그렸다. 미술반은 미술교사 최덕휴1922~98의 지도를 받았다. 최덕휴는 당시 고흐나 마티스처럼 강한 원색의 실경을 즐겨 그렸다. 정작 나희균은 최 선생보다 미술잡지의 영향이 컸다라고 말한다. 미술실에 있던 일본 잡지 <아틀리에>에서 폴 세잔느1839~1906를 처음 보고선 매료당한 이후, 석유사업을 하던 형부(언니 나영균의 남편 전민제)가 일본 출장길에서 사다 주는 고흐, 고갱, 세잔느의 화집을 보며 형태, 구도, 색감 등을 익혔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 <수욕도>, <생 빅투아르> 등의 그림들을 따라 그리며 세잔느의 순수한 정신세계에 빠져들었다. 나 화백이 말하는 순수 그림에 무슨 이데올로기를 담지 않고 오로지 회화적인 요소들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 화백도 세잔느 학습을 통해 자신이 점점 투명해진다는 느낌을 가졌다.

 

1950 3월에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월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란가 송도의 가설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장우성, 송병돈 교수 등이 가르쳤고, 하인두, 서세옥 등과 함께 공부했다. 공부래야 모델을 그리거나 종이에 풍경을 스케치하는 정도였다. 동기생이던 훗날의 남편 안상철1927~1993 중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느라 제대로 수업도 받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나희균도 친구들과 대한도자기 회사에서 초벌구이 접시에 성춘향과 이몽룡 같은 풍속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1953년 환도 후 한 학기는 연건동의 미대 캠퍼스에서 제대로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 나희균은 <한강에서>를 그려 제 2회 국선에 입선한다. 가장이 그림의 왼편에 서 있고 강가에 쪼그리고 앉은 아내가 두 아기들을 달래는 풍경이다. 당시 실기실에서 작업을 하는 나희균의 곁에 훗날의 배우자가 함께 작업하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으나 나 화백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줄곧 받은 인상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크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 없고 직접 영향을 받은 적도 없다고 말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가꿔왔다는 주장이다. 학생 때도 부모님의 잔소리 한 번 듣지 않고 공부를 알아서 했다. 그런 딸을 보며 부친은 희균이는 실속꾼이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런 개성의 소유자는 세상의 잣대보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더 중시한다. 납처럼 무거운 자기 중심을 갖고 있어 그 중심을 통해 주변을 본다. 자신에게 부끄러울 일은 일찌감치 피하거나 접어버린다. 1954년 서울대 미대 졸업 후 중앙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으나 했던 말을 반복하는 생활이 싫어서 한 학기만 하고 그만 둔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나희균의 그림 세계는 누구에게서 교육받은 결과라기보다는 자기 마음을 좇아 스스로 개척한 것에 가깝다.

 

 

나희균은 1955년 파리 유학을 떠난다.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불안한 교육환경 탓에 공부를 많이 못해 억울했다라고 느끼던 마음이 작용했다. 여고 시절 조우했던 폴 세잔느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부친이 한국동란 이후로는 이북의 재산을 모두 잃어 어려운 생활을 하던 와중이어서 유학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형부 전민제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프랑스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인 도불 유학생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에 도불 했던 이종우1899~1979 화백을 비롯해 나혜석, 백남순, 임영방, 남관, 이성자, 김흥수 등 몇 사람 되지 않던 시기였다. 주 프랑스 한국 대사관의 안응렬1911~2005 참사관이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의 초대장을 얻어준 덕이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제자이자 협업자이면서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1864~1943과 아메도 모딜리아니, 앙리 마티스 등이 거쳐간 유서 깊은 미술 아카데미이다. 나희균은 그곳에서 누드모델 데생을 주로 했다. 한국에서는 인체 기초 데생을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김환기1913~74 선생이 당시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도 한 학기 지도를 한 인연으로 나희균에게 자기처럼 반추상을 그릴 것을 조언했으나, 나희균은 자기 체질이 아니라고 판단해 거절하고선 거리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데 몰두했다. 구성을 중시한 그림들을 그리다 구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주관이 확실히 서지 않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1956년부터 57년까지는 예술대학 에콜 드 보자르 외국학생반에 편입해서 누드 크로키 수업을 받으며 지도 교수 르구Leguet를 좇아 반추상도 그렸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쥬 브라크 류의 그림들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쫓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 시기 나희균이 그린 그림들이 드로잉북으로 안상철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다양한 볼륨 간의 대조를 주제로 한 누드 크로키와 성당 벽화에 그려져 있던 종교화 모사, 기숙사에서 내다본 파리의 지붕들, 거리 풍경 등이었다. 방학 기간에는 단체로 독일과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중부 프랑스, 이태리, 영국을 여행하며 거장의 작품들과 함께 고색창연한 성들과 자연을 눈에 담았다. 나희균은 그때의 인상 기를 1956 6 22일 자 조선일보에 최근의 파리 화단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바 있다. 그 속에 ‘5월 전이라는 뜻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목도한 피카소의 200 <나부상>과 레제, 마네시에, 뷔페 등의 출품작을 소개했다. ’가을 전에서 만난 조르쥬 브라크와 피에르 보나르의 회고전 소감도 썼다. ’5월 전이 점차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새 둥지, 해변, 여인상 등 브라크의 작품들 만큼은 가장 프랑스적이고, 우아하고, 장인 답게 능숙한 재료 선택에다 견고한 구조가 돋보였다라고 극찬했다. 1957 8 4일부터 3일간 서울신문에 연재한 파리통신:인간성의 부활  여러 전시회에서 본 소감에는 헨리 무어의 작품들이 “‘에너지가 저축되고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강렬한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전범을 그대로 실현했다.”라고 썼다.

 

나희균(좌)과 김환기 부부

 

나희균은 귀국을 앞두고 유학 시절 그림들을 1957 6월 세느강 변 베네지트 화랑에서 개인전으로 선보였다. 20점 정도였다. 모두 없어지고 나무 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는 고성을 그린 <이태리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김환기, 변동림, 남관, 권옥연, 이병복 등이 다녀갔다. 독일 가던 길이었던 윤이상도 들렀다. 전시회를 마치고 오사카로 향하는 귀국선을 타러 마르세이유로 내려갈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토록 그리던 액상 프로방스의 세잔느 고거와 생 빅투아르 산도 보았다. 한 달 걸려 오사카에 도착해서는 화물선 편으로 부산으로 향했다.

1958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귀국 개인전을 연 이래 59년에 두 번 더 개인전을 가졌다. 하인두, 한묵, 문신, 유영국, 김창열, 장우성, 장욱진, 송병돈, 김종영, 이상범, 김인승, 천경자, 최덕휴 등 화단의 명사들이 대거 몰려와 축하를 해주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상기시키는 회색 톤에 청색을 쓴 <모자상> <지붕>, <카타콤브> 등이 전시됐다.

 

<지붕> 나희균

 

1958년 나희균은 국전에서 부통령상을 수상한 서울 미대 동기생 안상철의 <잔설殘雪>을 보러 갔다가 작품에 매료당했다. 그전에 보지 못했던 안상철의 매력을 발견한 것일까. 1959 12월에 그와 결혼한다. 안상철은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1953년에 <만추>로 입선했고, 56년과 57년에는 연이어 문교부장관상을, 58년 부통령상에 이어 59년에는 <청일晴日>로 대통령상까지 수상했다. 결혼 이후 나희균은 10년간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1965년 안상철이 서라벌예술대학 교수가 되고 불광동으로 이사하면서 뒷산을 바라보다 바위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고 때 마주했던 세잔느의 산 그림 <생 빅투아르>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바위들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묘사됐다. 이 역시 세잔느의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잔느에 대한 오마쥬일 터였다.

 

 

<아침> 나희균

 

이 바위 작품에 대해 시인 김영삼은 자기 주체 세계를 개척하는 정신 태도라고 보았다. 그녀를 주욱 지켜보던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1963 나희균은 강인하고 성실한 의지로 조형의 밑바닥을 간직했다.”라고 평하며, “아직 불발탄이지만, 생활에만 지지 않으면 대성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결혼 후의 생활은 그녀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아이를 넷 낳아 정신없이 살았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관철동에 전세 살면서 8~9년간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신혼 살림집에는 박서보, 김창열, 하인두, 방근택 등이 찾아왔으나 남자들끼리만 어울리고, 나희균은 끼워주지 않았다. 그 기간에 나희균은 돈 벌고 아이 키우느라 미술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했으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현실을 회화적인 요소로 나타내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추상화로의 방향 전환이 움트던 시기였다.

 

<예악> 나희균

 

1970년대 들어 가진 4차 개인전에는 네온, 파이프, 철 등을 사용한 입체 작업을 선보였다. 언젠가 그리스계 미국인 여류작가 바르다 크리사1933~2013가 전시한 네온 작품을 보면서 상업용 매체로도 예술을 할 수 있구나라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되살렸다. 나희균은 5가지 색깔의 네온 등을 이용해 <삼각의 네온>, <>, <성체등> 등을 형상화했다. <성체등>은 빵 모양의 성체와 생선, 성배를 표현했는데 현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소장하고 있다. PVC 파이프와 철을 사용하기도 했다. 잘 깨지는 네온등을 대체한 것이었다. 철은 구멍을 내고 판금을 해서 다른 소재와 합성하는 재미를 주었다. 공정이 유사해 바느질이라고 여기며 즐겼다. 새 오브제를 사용한 작품들은 대중소비사회나 사회구조의 상징적 의미를 표현했다.”라며 라이트 아트Light Art’ 계열로 보려는 평을 낳았지만, 작가는 순수한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했을 뿐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오브제들로 자연의 이미지를 끌어오려는 시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회화인지 조각인지 장르가 애매했다. ‘철로 그린 그림으로 여겨 회화로 보는 이도 있었고, 미술사가인 김철효1945~는 부조浮彫로 여겼다. 체력을 요하는 장르였지만,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을 정도로 작품 창작에 몰입했던 시기였다. 모두 40점 정도 만들었다. 나희균은 기억을 더듬더니 회화에 입체를 도입한 건 1962년 남편이 먼저 시도했다라고 기억해냈다. 안상철의 62년 작 <몽몽춘>은 종이에 돌과 수목을 함께 써서 구성했다. <> 시리즈도 종이와 목재에 암석이나 모터를 부착한 작품들이다. 그러면서도 나희균은 그 답게 다시 정리한다. “남편에게서 은연중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83년의 입체작품 <-83>을 시점으로 나희균은 현대작가 반열에 진입한다.

 

<낙엽의 계절> 연작 나희균

 

나희균은 70,80년대에 걸쳐 다섯 번의 전시회를 열며 활발히 작업을 했지만, 마음에 들 만큼은 아니었다고 자평한다. “전 생애에 걸쳐 만족했다고 할만한 시기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현재에 그치지 않고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캐릭터로 비친다. 아흔 나이에 한문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 예이다. 논어를 마치고 중용을 공부하고 있다.

 

 

다시 회화로 돌아온 것은 90년대 이후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철 다루기가 힘에 겨웠던 까닭도 컸다. 그후 30여 년간 평면작업을 해오고 있다. 1993년에 남편을 잃은 후부터 생활하듯이, 일기를 쓰듯이,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갖게 됐다. 1994년에 TV에서 목도한 앙골라의 공군기 추락 사고를 보고 그린 수채화 <비행사고>도 참혹함을 느낀 나머지 기록한 일기였고, 성수대교 참사를 그린 <나락으로>와 아이가 죽으면 모래에 묻는 아프리카의 풍습을 전해 듣고 그린 <어린이들의 매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낙토樂土> 역시 95년에 작고하신 모친을 기린 작품이다. 나희균은 자신의 작품이 그림일기 같은 성격이어서 딱히 부족하지도 않지만, 대단하다고도 여기지 않는 투였다. 1995년에 펴낸 수채풍경화 도록의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늘 한발 뒤쳐져 가는 나와 같이 그림들도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 둘 거둘 점이 있으리라는 작은 위안으로 이 책을 엮는다.”라고 지극히 담담하게 썼다. 시쳇말로 cool’하다. 네온이나 파이프, 철 등 새 오브제로 입체미술을 하며 앞서가기도 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다. “내가 한 발 앞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박서보, 김창열 이런 사람들이 앞선 사람 아니었나요?” 박서보와 김창열 등은 아방가르드(전위) 계열로서 파리 유학 시절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은 앙포르말Informal 추상이나 기하 추상을 우리 화단에 심으려 했던 인물들이다.

 

 

<장송행진곡> 나희균

 

나희균은 그림에 어떤 주의나 이념을 담을 줄 모른다. 평론가들은 습관대로 어떤 경향이나 파 속에 그의 그림을 넣어 정의하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사양한다. “그냥 표현하고 싶었다가 전부이다. 90년대 작품들에는 <새들의 죽음>, <낙엽의 계절>, <장송행진곡>, <어둡고 긴 밤> 등 죽음을 주제로 한 것과 <갑골> 연작 같은 글씨를 회화화 한 것들이 있어 평자들이 하나의 특정 시기로 분류하려 해도 작가는 그냥 웃기만 한다. ‘죽음은 남편과 모친이 차례로 돌아가셨으니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정작 작가는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라고만 답한다, ‘TV나 어디에서 보고 영감을 받아 표현하고 싶어진 거라는 게 그의 제작 동기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세상에 빚진 것도 없고 미안해 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덤덤함이다. 명예나 성공 같은 단어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좇을 뿐이다. 1998년에 펴낸 <나희균 작품집 도록>의 작가노트에도 나는 자연을 너무 좋아한다. , 나무, 바위들이 매우 신기하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 시대의 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밝혔다. 2004년의 <위태로운 계단> 연작도 세잔느의 파사쥬Passage 기법 운운에 뭐 특별한 게 아니라 매일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오르내리잖아요. 테마로 삼으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바리에이션도 얼마든지 가능하고요라고 말하고, 2005년의 <진동> 시리즈도 누군가가 모든 물질이 진동하면서 변해간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흥미를 느껴 표현했다라고 밝혔다. “나무나 바위나 모래나 모두 진동 때문에 변해가고 있구나, 깨닫게 됐다라고 말한다. 이런 식이다. 인위적인 의미 부여나 확대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추상성과 조형성, 사실성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어떤 표현이 주제를 드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일지만 생각한다. 목수가 나무를 다듬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연장들을 꺼내 쓰는 것과 닮았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을 톱 시기’, ‘대패 시기’, ‘끌 기법 등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은하수> 나희균

 

2009년 무렵에는 빛에 관심을 두었다. “우울해지려는 스스로를 붙잡으려” <내 안의 빛>을 그리고, 석양이 수면에 비치면서 만들어지는 빛을 <고요>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종교적인 경험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에서 다양함과 경이로움을 재발견한 것이다. 빛에 대한 그의 관심은 최근 밤하늘의 별들로 이어졌다. <별무리>. <성운>, <미리내>, <나의 은하수> 등이다.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 이런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됐지요 사람이 보든 말든 상관없이 빛나는 게 너무 놀랍고 너무 신기해요

별 그림들은 대작이고 그의 대표작이 될 만하다라는 게 평단의 중평이다. 한 작가가 꾸준히 표현하고자 노력한 결과 80대에 이르러 빛을 발했다, 하겠다. 2023년 나 화백은 대한민국 예술원 상을 수상했다.

 

<내면에 빛을> 나희균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돌아보다 서울미대 동기생이었던 옛 친구들과 추억처럼 조우할 때가 있다. 추상화가 하인두, 유리화가 이남규 등이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구도의 자세로 작업에 임했던 장인들이었다. 재료와 표현기법에서 동서 융합을 시도했던 남편 안상철도 있다.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접하면서 갖는 좋은 그림의 의미는 어김없이 그의 주제가 된다. 2018년부터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사람의 일생을 그린” <먼저 떠나간 친구들을 생각하며> 등 레퀴엠Requiem 시리즈를 내고 있다.

 

 

90세의 노화백이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나희균이라는 기차는 눈에 띄지 않게, 느리지만 묵묵히 달려온 완행열차를 닮았다. 하나의 특징으로 설명되는 작가의 길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그때그때 찾아온 감정들을 진솔하게, 꾸준히 화폭에 담았다. 그는 자기 시간의 성실한 주역이었다. 미술관 앞 호숫가 뜰에서 상추를 따느라 열중하는 노 작가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