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투쟁한다” 탈북 ‘머구리’ - 박명호 본문

“가족의 행복을 위해 투쟁한다” 탈북 ‘머구리’ - 박명호

gubo54 2022. 8. 12. 14:26
728x90

 

머구리는 잠수부를 일컫는다. ‘잠수를 뜻하는 일본어 모구리에서 비롯됐다. 수중 호흡기를 등에 단 날렵한 모양의 스쿠버들과 달리 달 탐사하는 우주인 같은 차림새다. 투구에 납 벨트, 쇠 신발 등을 장착하고 바다에 뛰어든다. 호흡은 배에 연결된 공기 호스에 의존한다. 이 호스가 생명줄이다. 60kg의 잠수복 무게 탓에 혼자 힘으로는 수면 바깥으로 떠오를 수 없어 배와 긴밀하게 소통해야 한다. 위험천만한 직업이다. “열에 다섯은 중도 포기하고 3명은 목숨을 잃고 1명은 병에 걸린다라는 오싹한 소문이 따라다닌다. “저승 가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말이 나올 정도로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

남한의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대진에 이 머구리를 직업으로 가진 박명호1965~ 씨가 있다. 그에게 동해는 생존의 일터이다북쪽으로 3.8km 떨어진 저도 어장이 그의 일터이다. 지척이 북한이다. 바다 위 국경인 NLL 1km 남쪽이어서 늘 긴장이 감도는 곳이다. 이 어장은 군사분계선이 보호망 역할을 해서 어종이 풍부하다. 그는 이 바닷속에서 문어를 잡는다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하루 4시간씩 작업한다. 겨울 산란기 석 달은 저도 어장이 폐쇄돼 그 아래쪽에서 작업한다. 이 해역은 문어의 주산지이다.

 

 

박명호 씨는 가족과 함께 이 항구의 한 켠에서 횟집을 운영한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별장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바닷가 화진포가 지척이다. 간판에는 자신의 배 이름인 청진을 담았다. 실내에는 일가족 4명이 선창가에 앉아 환하게 웃는 사진이 걸려 있다.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흔적은 찾기 어렵다. 박 씨와 두 아들이 직접 잡아오는 선도 높은 생선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광어, 도다리, 돌참치, 복어, 전복치, 노래미, 도미, 쥐치, 우럭 등이다. 문어 역시 찾는 손님들이 많다. 유명세 덕도 보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영화와 TV로 여러 번 알려졌기 때문이다. 탈북자들과 실향민들도 각별하게 여기며 발품을 팔아 찾아온다. 2000년에 신의주서 넘어와 인제에 산다는 50대 여인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고, 해방 직후 월남한 82세 노부인은 이 집의 존재를 방송에서 접한 셋째 사위의 손에 이끌려 왔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최곱니다. 문어가 싱싱하고 부드러워서 정말 맛나요

 

바깥에서 손난로에 언 손을 녹여가며 횟감을 썰던 박명호 씨는 그들의 평가에 흐뭇해한다. 그의 고생을 알아주는 것 같은 고마움에서이다. 문어는 사냥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길이가 2m 안팎이고 무게는 5kg에서 45kg까지 다양하다. 15kg 미만은 소문어로 분류되는데 인기가 높다. 15kg 이상의 대왕문어는 힘이 세서 잡기에 버겁다. 게다가 문어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잘 숨고 동작이 민첩하다. 대개는 자망이라 부르는 그물 낚시나 반짝이는 미끼를 이용하는 연승 낚시로 잡지만, 박명호 씨는 직접 바다로 뛰어들어 맨손으로 잡는다. 해저 20m의 깊고 어두운 공간에서 그는 매일 홀로 사투를 벌인다. 하루에 대략  20~40마리씩 사냥한다. 무게로는 400kg 안팎이다. 베테랑급 솜씨이다. 잡아온 문어는 kg 12,000원에서 48,000원을 받고 넘긴다. 작을수록 값이 비싸다. 한두 마리는 식당에서 숙회로 판다. 매일 벌이는 사투가 돈으로 보상되는 파이터의 삶을 사는 셈이다.

 

 

그에게 있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는 일은 숙명적인 듯 보인다. 박명호 씨는 2006년 가족과 함께 황해도에서 목선을 타고 사선을 넘어 남으로 탈출해 왔다. 전제주의 체제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그의 준비는 1990년대부터 싹터 2003년부터 구체화됐다. 함경북도의 원산 함흥 이원 등 동해안 공군부대에서 복무하다 2002년 상위(대위)로 예편한 후 장진의 후방기지에 배속되면서 머구리 일을 배워 3년 간 했다. 이 기간에 그는 결심을 굳히고 탈출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에 들어간다. 2005년 이원에서 차를 임대해 부모가 계시던 황해도 옹진으로 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휘발유와 엔진 오일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격으로 힘든 일이었고, 이주를 위한 옹진군 관계자의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라는 핑계와 함께 뇌물이 필요했다.

 

“10년 치 월급을 안 쓰고 모아야 가능한 일이었어요. 돈 없으면 탈출도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황해도 옹진의 천혜양식사업소에서 미역 다시마 양식일을 하던 부모님 댁으로 옮겨간 박 씨는 이원서 준비해 간 판자로 배를 만들어 그 이듬해에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의 꽃게잡이 배들이 연평도 해역에 몰리는 4월을 결행일로 잡은 덕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북한 경비정들은 중국 어선들 쫓느라 탈출하는 배에는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주도면밀하게 검토한 계획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군 장교 출신이어서 여러 정보에 접근이 가능했던 점이 도움이 됐을 터이지만, 가장 큰 힘은 그의 탈출 의지였다.

 

“1990년 대부터 북한의 체제가 점점 비관적으로 악화돼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체제에서 가족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한의 품에 안겼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낯선 체제로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시도는 아닐 터이다. 삶의 모양을 그리는 저마다의 개성 차이 탓일까? ‘좋은 삶을 원하는 인간으로서의 갈증 때문일까?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진 불만스러운 삶의 전개에 순응하지 않고 반발하며 맞섰다. 자기 결심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무수한 자문자답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하고 의논을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오롯이 혼자서만 감내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마침내 그는 결행을 결정했고, 그 결정은 거침없는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판선에 가족을 싣고 총칼이 지키는 경계를 넘음으로써 그의 의지는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스스로의 디자인으로 삶을 그리고 싶은 바람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의 실천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삶을 살려면 오롯이 내가 그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 그 시작은 그의 목마름에서 비롯됐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하나 간절한 욕구. 그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침노侵擄라는 단어는 헬라어 비아조를 번역한 것으로 창조적 호전성으로 해석된다. ‘긍정적 적극성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그것은 천국으로 가는 문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듯 좁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때로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호전성과 적극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싸움이다. 박명호 씨는 그 침노에 힘입어 유아독존을 실현했다.

 

모든 존재에서 공통으로 목격되는 것은 혼돈과 고뇌 속에서 창조적 변화가 태동한다는 진리이다. 혼란을 깨부수고 창조적 변화를 이루고 싶어 하는 개체는 흔치 않다. 외롭고 엉뚱한 존재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무리와의 교감을 거부하고 떨어져 혼자 돌아다니는 엉뚱한 개미가 먹이와 지름길을 찾고, 99마리의 무리들과 결별한 외톨이 양 한 마리만이 멀리서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양들과 양치기의 모습을 바라본다. 철학에서는 이런 괴짜들의 창의성이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발전을 이끈다고 본다. 카오스chaos를 경험한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무늬이다. 질서 속에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맛보지 못할 짜릿한 전율이다.

 

다른 체제에 성공적으로 연착륙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박 씨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남한에서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음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그가 갈망했던 좋은 삶을 찾았을까.

 

처음엔 용인에서 살며 아내는 식당서 일하고 저는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잡일을 했는데 힘들었죠. 일의 성격도 그렇고, 무엇보다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편치도 않았지요

 

당 비서급으로 일하던 엘리트의 삶에서 1일 용역직으로 신분이 떨어진 셈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2008년 그는 북한서 배운 머구리 기술을 써먹기로 작정하고 수소문 끝에 고성에 둥지를 틀었다. 대진항 어촌계에 가입해 식당을 차렸다. 돈을 좀 모아 배를 구입해 조업에 나서자 그때부터는 다른 조합원들과 경쟁관계가 되면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경직된 조직인 어촌계 조합원들과의 갈등은 맞서 싸우는 수밖에 달리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그의 생존 투쟁은 여기서도 계속되는 셈이다.

 

박명호 씨는 매일 아침 아들 둘과 함께 배를 몰고 일터로 향한다. 가족이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탈북자 가운데 15%가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현실에서 보면 박 씨네는 잘 이겨낸 경우에 속한다.

 

진모영 감독이 그의 이야기를 다룬 2017년 작 다큐영화 <올드 마린보이>에서 이 드라마틱한 인물은 말한다.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생존을 위해 투쟁할 때입니다

 

영화 대사로 다듬어진 느낌이 있긴 해도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말은 그의 삶을 관통해온 키워드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투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 임을 애써 강조한다. 이 사나이는 가족을 위하지 않는 가장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강직함을 보인다. 가장으로서 운명을 건 모험을 감행했고, 낯선 곳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와 싸워 왔음에랴. 그는 힘주어 말한다.

 

남한 사람들은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 애쓰지만 북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싸웁니다

 

가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에게 가장의 덕목이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다큐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황혼의 노부부 이야기를 다룬 바 있는 진 감독은 진솔한 삶의 모습에 깊은 애정을 표출하는 작가이다. 그 애정은 대상에서 감지되는 비애와 닿아 있다. 진 감독이 박명호 씨를 통해 부각하고 싶었던 화두 역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게 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으며 살아왔다. 진 감독의 표현처럼 매일매일 저승에서 몸부림치며 일하다가 가족이 있는 이승으로 올라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그렇게 사는 삶을 부여받았고 그것이 그가 선택한 아름다운 순간들이라면, 그는 그의 천국에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018 A-채널에 출연해 밝힌 북한 탈출기에서 박 씨는 14살이었던 둘째 아들이 탈북을 주저하자 술을 먹여 뻗게 만든 후 데려왔다라고 말해 스튜디오를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아버지로서의 결단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두 아들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고기를 잡고 식당을 운영한다. 배를 운전하고 배 위에서 아버지의 물밑 작업을 돕는다. 아내도 부엌일을 맡아한다. 박 씨가 아내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사람이 사장이고 우리는 직원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대학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라며 진학을 말렸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 출신 아들들이 편견과 차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큰 아들은 그의 말을 따라주었으나 둘째는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으며 대학에 진학해 정치외교학을 공부했다. 아버지는 둘째도 취직하느라 고생하느니 가족 사업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코로나로 취업이 어려워지자 둘째도 아버지의 곁을 지키고 있다. 베트남서 바다 건너온 첫째 며느리도 일손을 돕고 있다. 베트남과는 어떻게 인연 지어졌을까. 북한과 베트남이라는 이역의 남녀가 한국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여러 사연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베트남 처녀들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려 들지요. 사회주의 체제에서 산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 있고요

 

박 씨는 둘째 며느리도 베트남에서 취할 생각이다. 그의 며느리 관은 두 아들이 자기가 기반을 닦아 놓은 가족 사업을 무난히 이어가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원모심려를 담고 있다. 둘째에게는 서울에 분점을 내주어 독립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매일 아침 대진에서 그날 손수 잡은 해물을 보내주어 서울 속의 동해를 펼치려는 계획이다.

 

 

2021 1 9일 오후에 다시 들렀더니 아침에 잡은 문어와 해삼, 멍게, 섭 등을 상에 올렸다. 우리는 그가 잡아온 해물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망설이다 박명호 씨에게 여기 내려온 결정에 만족하는지를 물었다. 필자는 다소 회의적이었으나 그는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답했다.

 

! 그럼요. 만족하다 말다요!”

 

두 아들도 똑같이 여기 삶에 만족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상 떠난 부친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를 내려가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아버지였어요

 

사회주의 이념에 투철한 평생을 살아온 상좌(대령) 출신 부친은 북한 사회를 어둡게 전망했다. 1990년대 들어 거리에 굶어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기 시작하자 그는 우리가 이런 세상 만들자고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나라며 절망했다. ‘인민 영웅급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고심 끝에 아들 가족만큼은 남한으로 내려가 다른 삶을 살기를 독려했다. 아들도 자신이 체제의 부속처럼 살고 있다는 자각을 갖게 됐다.

 

열쇠 9개 받아 지키는 일만 하는 게 중대장의 업무였습니다

 

비유적인 표현에서 권리는 없고 의무만 가득한 답답한 폐쇄사회의 삶이 전달되었다. 조금만 잘못되면 가차 없이 책임 추궁만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점차 굳혀갔다. 아버지의 깨우침 덕이었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지지 말라는 게 아버지의 당부였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월남 후의 삶에 만족한다는 박 씨의 말은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남한에서 반드시 행복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필자는 한순간 박명호 씨의 얼굴에 그의 부친의 존재가 겹치는 걸 느꼈다. 두 가장이 모두 자기 아들들을 위해 소임을 다하려는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까닭이었다. 훌륭한 아버지들이었다.

 

필자는 그의 바닷가에 상징물 하나를 세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을 등과 어깨에 짊어진 머구리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을 담은 조형물이다. 그 존재가 데이비드 걸스타인David Gerstein1949~의 조형물 <유포리아Euphoria  행복한 자전거>처럼 행복의 기운을 마구 발산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바다와 깊은 인연 속에 있는 박명호 씨 가족이 풍경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