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한지장韓紙匠 – 김삼식 선생 본문
절집이나 조선집에서 잠을 잘 때면 아침에 한지창을 통과해 스며드는 빛에서 한없는 평화로움을 느끼곤 한다. 그 안도감은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에서 감지되는 유형과 닮았다. 우리 종이가 함유하고 있는 서정성 덕분일 것이다.
문경새재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사이에 가로놓인 벽이다. 조선시대에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하려 이 고개를 넘어 충주와 경기도 이천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장원급제가 나오면 소문이 바람처럼 날아와 이 고개턱을 먼저 넘었다. ‘경사를 듣는다’라는 뜻의 문경聞慶이 지명으로 생겨난 배경이다. 새재를 넘으면서 학생들이 서로 공자왈 맹자왈 했을 것이고 보면, 이 고갯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문지로人文之路인 셈이다. 2006년 새재 쪽으로 향하다 쌍용계곡 못 미쳐 농암마을에서 한 장인을 만났다. 한지장인 김삼식1943~ 선생이었다. 새재 언저리에서 만난 한지는 인문지로의 풍경답다는 느낌을 준다. 그냥 지나치려다 걸음을 멈추게 된 것은 전통 한지에 담긴 선생의 고집스러운 자세 때문이었다.
“나는 옛날 그대로 만드는 것밖에 모릅니다.”
물질을 계속하며 선생이 필자에게 밝힌 짧은 소신이었다. 필자는 그 한 마디에서 그의 인품과 성격, 삶의 모토 등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그 사람됨을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짐작대로 김 선생은 고집쟁이였다. 선생의 표현대로 “우둔할 정도로 숙맥”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그 우둔함이 선생을 장인의 반열에 올려놓았음을 알게 된다.
전통한지를 만드는 데는 손이 많이 간다. 가까운 밭에 닥나무를 직접 심어 1년을 자라면 채취한다. 20kg을 한 단으로 묶는데 이 한 단으로 창호지 크기 스무 장을 생산한다. 그 해 생산한 닥은 그 해 소비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해를 넘기면 상품성이 떨어지는 까닭이다. “원칙을 어기면 천 년을 사기치는 게 된다”라고 생각한다. 이 닥나무를 12시간 동안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벗겨 낸 껍질을 물에 담가 불려서 겉껍질을 벗긴 후, 속껍질(백피)만 긁어내고 잿물에 넣어 3시간 동안 삶은 다음 얻어낸 백피를 두드려 섬유를 분리하고서 물에 푼다. 이어서 풀을 섞어 물질해 뜬 종이를 말린다.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완성하는 데 보통 넉 달의 시간이 소요된다. 시간뿐 아니라 몰입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종이 뜰 때는 물질하는 횟수가 일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숫자를 세죠. 안 그러면 두께가 달라져요. 사람이 찾아오면 방해가 돼서 아예 문도 잠그고 작업합니다”
1970년 대에는 이곳 문경에만 한지공장이 20곳 이상이나 됐지만, 한지 수요가 줄어들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남은 공장들도 개량 방식으로 선회한 지 오래다. 개량 한지는 화학약품을 쓰는 덕에 품이 훨씬 덜 드는 데다 잡티가 들어갈 여지를 주지 않는 장점이 있다. 전통한지라도 모든 부분에서 전래 기법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불을 땐 예전처럼 방 안에서 종이를 건조하는 대신 수증기로 달궈진 철판 위에 얹어 말리고, 백피를 두드릴 때 방망이 대신 기계로 두드리는 등 일부 과정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제조의 요체는 바뀌지 않고 있다. 닥나무를 쓰고, 화학약품이 아닌 칼로 일일이 긁어 겉껍질을 벗겨 내며, 양잿물 대신 전통방식의 메밀가루 잿물을 고수한다. 부득이 약품으로 대신할 경우에는 화학약품이 아닌, 메밀대와 콩대 등을 이용해 만든 천연재만을 고집한다. 풀도 화학풀이 아닌 ‘황촉규(닥풀)’라고 하는 식물로 직접 만들어 쓴다.
물질도 전후좌우로 함으로써 ‘우물 정(井)’자 형태의 조직을 만든다. 한 방향으로만 하면 방향성이 생겨 잘 찢어진다. ‘외발뜨기’ 식 물질 방식 덕에 섬유가 직교하면서 서로 얽혀 질겨지는 것이다. ‘외발뜨기’는 틀 위에 발을 얹고 앞물을 떠서 뒤로 흘려버리고 옆물을 떠서 서로 반대되는 쪽으로 흘려버리는 동작을 반복한다. 한 장에 12회 이상 하므로 년간 전체 물질 수는 수십만 회에 달하기 마련이다. 그 덕에 내구성과 보존성이 훨씬 강해진다. 질기고 오래가는 격자 직교 한지는 통일신라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도 쓰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 남았다. 그만큼 한지의 기록유산성은 독보적이다.
한지는 1년 중 석 달 정도밖에 만들 수 없다. 더워지면 원료가 상해서 만들 수 없어 서리 내릴 때부터 3월 초까지만 만든다. 추울수록 질은 더 좋아진다. 기껏해야 하루에 200장 정도밖에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연간 생산되는 한지가 2만 장에 불과하고, 그만큼 대량 생산되는 개량한지보다 비싸지만, 그의 장인정신을 아는 고객들은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 이런 정신과 노력을 인정받아 2005년 경상북도로부터 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지정받은 바 있다. 이제 그의 한지는 문경을 넘고 한국을 넘어 세계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이 마저 하지 못한 말들은 종이가 한다.”라고 여겼다. 실록과 고서들의 기록이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배경이다. 그 종이의 최고봉은 단연 ‘고려지’였다. 글의 모양을 내고 천년의 시간을 견디는 기록지로서의 특장 때문이었다. 그 고려지를 김삼식 선생이 옛 방식에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 선생의 공방에는 영국, 프랑스 등 세계적인 박물관 관계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장인의 한지는 201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 관련 공예품 전시회에서 국내외 예술가들로부터 처음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선생의 한지가 국보인 조선왕조실록과 ‘고려 초조대장경’의 복간에 쓰인 사실 때문이었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판각을 시작해 선종 4년(1087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1232년 불에 타 없어졌으나 대구시와 대한불교 조계종이 2011년에 제작 1000년을 기념해 다시 출판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록 밀랍본 복간을 위해 전국의 한지를 찾은 끝에 ‘’천년을 버틴다‘는 그의 작품을 실록 복간 한지로 선정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도 로스차일드Rothchild 컬렉션 가운데 판화 ‘성 캐서린의 결혼식’을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선생의 한지를 사용해 복원했다. 로스차일드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 가문으로 꼽히는 로스차일드 가문 소장 미술품이다. 루브르 박물관 측은 기록 유물 보수용 등의 종이로 오랫동안 일본의 화지和紙와 중국의 선지宣紙를 사용해 왔으나 내구성과 보존성에 단점이 발견돼 애로를 겪다가 2016년 2월 선생의 한지를 접하고선 놀라움을 금치 못한 끝에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문경고려지 삼식지소’라는 이름을 쓰지만, 처음에는 ‘삼식공작소三植工作所’라는 현판을 사용했다. 신라 경순왕 39 세손인 선생에게 조부는 ‘오래 살라’는 뜻에서 삼식三植이란 이름을 지어주셨다. 선생은 조부의 뜻을 “전통, 성실, 정직 세 가지를 심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 세 가지 원칙을 꿋꿋이 지키며 장인의 길을 걸어왔다. 선친이 9살에 돌아가시고 품팔이로 생계를 잇던 홀어머니를 돕고자 학교를 그만두고 시집간 누이 집에 일손을 다니다 한지와 운명적인 조우를 했다. 매형의 형님 되시던 유영운 선생에게서 한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어린 사돈이 거쳐간 제자 가운데서 가장 쓸모 있다고 판단한 사형이 선생을 후계자로 삼았다.
‘한지 수요가 많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지가 장례에 많이 쓰여 굶지는 않았다”라고 말한다. 김 선생은 불경기로 종이가 팔리지 않을 때는 닥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었고, 가축을 키우고, 농지를 임대해 농사도 지으면서 손에서 한지를 놓지 않았다. 77세이던 2019년까지만 해도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한지를 팔아야 했던 그는 이제 일일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전국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장인이 됐다.
2021년 10월 16일 문경 농암마을로 김 선생을 다시 찾아갔다. 입구의 닥나무와 황촉규 밭은 여전했지만, 10여 년 세월이 흐른 지라 그새 전수관이 들어섰고 집도 새로 지었다. 시설과 도구들도 많이 나아졌으나 제조 과정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손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홍두깨와 칼, 박피 받침대, 황촉규, 콩대, 메밀 짚, 양잿물 등이 눈에 들어온다. 김 선생의 한지는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에 가장 품이 많이 든다. 겨울에 생산된 닥나무를 삶아 벗기고 말려서 보관했다가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백피를 만든 후, 이듬해 3월까지 겨울 기간 동안 한지를 만든다. 시즌에 돌입한 것이다.
선생은 허리가 많이 굽어 보기에 안타까웠다. 정형외과에서 수십 번 주사를 맞았으나 별무효과라며 병원의 무능을 질타했다. 필자의 방문을 견디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했음을 알고는 송구스러웠다. 정작 본인은 “일하는 사람이 허리가 굽는 건 자연스런 결과”라며 “농땡이들이 허리가 반듯한 법”이라고 웃었다. 여전히 우스개 소리를 잘하셨고, 화법도 감추는 법 없이 직설적이었다. 자기 종이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했다.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며 타협을 모르고 살아온 장인만이 보일 수 있는 기개였다. 한지장 지정을 축하한다고 인사말을 건네자 계면쩍어했다. 김 선생은 2021년 7월 28일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에 지정됐다. 한지장으로서는 네 번째 지정이어서 실력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은 감이 있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한지장이 되면 종이 제작에 불편함이 없도록 정부가 지원한다. 지금 장인의 곁에는 든든한 후계자 아들이 함께한다. 46세의 막내아들 춘호 씨는 아버지의 경험치를 수치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후세가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끔 자료를 남기려는 것이다. 충북대학교에서 한지제조 과정 석사과정을 밟은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아버지의 방에는 고려지 제조 과정을 쓴 아들의 논문집이 자랑스럽게 서가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70년 시간이 거기 담겨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경험이 여전히 데이터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수치화한 대로 진행해도 풀리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쓱 한번 보고는 맥을 짚어 문제를 해결해 준다. 아버지의 세월이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다. 닥과 짚을 반반씩 섞어 만드는 함경도 식 고정지 전통 제조 기술 복원에도 참여하고 있다. 전통은 한번 단절되면 돌이키기 어렵고 아예 없었던 것이 돼버리기 때문에 우리 것 지키기를 자신의 소명으로 여긴다.
선생의 제지 철학은 자신을 이을 막내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아들이 가업을 잇고 싶어 하자 “우선 돈을 많이 벌어보라”고 권유했다. 아들이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3년을 뛰면서 큰돈을 모으자, 이번에는 “적게 버는 일을 해보라”고 주문했다. 아들은 다시 주유소에 취직해 꾀죄죄하게 3년을 살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엄친 곁에서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의 주문은 ‘돈에서 자유로워야 예능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김 씨는 아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처음에는 한지 제조의 계보를 이으려 하자 고생길이라며 반대했으나 DNA가 이끄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손자도 7명이나 있어 3대 승계도 가능하다. 부자父子의 노력이 있어 우리 고려지는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선생은 “자식이 오지 않았으면 버티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알려진 것도 아들 덕분이다”라며, “나는 성공했다”라고 말한다. 아들은 <문경전통한지 삼식지소> 안내 책자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선생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책에 적힌 대로만 하면 누구든지 고려지를 만들 수 있어요”
선생은 가난 탓에 어린 시절부터 산에 올라 나무도 하고 밭일에 한지 만드는 일까지 거들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산 위에서 학교 쪽을 바라보며 솟구치는 비애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다 보니 곁에서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에 익숙해져 갔다. 소리에서 신민요, 노동요, 가요에 이르기까지 그의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문경 아리랑’은 특히 꺾기가 묘미다. 선생의 노래는 세월의 고단함과 무심함이 배어있어 독특한 맛을 낸다. 개사도 많이 했다. 삶은 닥나무를 홍두깨로 내리치며 그는 부른다.
“이놈의 홍두깨는 어찌 이리 팔자가 사나워 날이면 날마다 매를 맞나”
홍두깨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불렀다. 때리는 박달나무 홍두깨도 맞는 닥나무도 모두 아플 터였다. 노래를 부르며 그도 속으로 울었다. 인생이란 묘한 것이어서 어느 해엔가 경북도청에서 사람들이 불쑥 찾아들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몇 곡을 불렀더니 감탄하는 낯빛이었다. 문경 소리 무형문화재를 위촉하려고 심사위원들이 찾은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노래는 입소문이 자자했다. 그 지방 노래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까닭도 컸다. 한지보다 노래로 먼저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그의 노래는 맛이 깊다.
“오르막길 사아십 리 내리막길 사아십 리 팔십 리 문경새재
님따라 가자 하니 고향이 멀고 고향에 남자 하니 님이 멀어지고
오도가도 못하겠네 문경새재 해가 저문다
오는 봄은 한철이오 연못에 피는 꽃은 사시사철이라 춤추는 연못이오”
“여름 되면 하루 놀러 오시오. 나도 하루 손 놓을 테니 같이 냇가에서 천렵이나 합시다” .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기 집을 찾은 손님을 식사대접도 못한 채 보낸다며 못내 아쉬움을 보였다. 요즘 보기 어려운 맞절을 하며 통성명을 하더니 헤어질 때까지 예의와 성의를 잃지 않는다. 이 지역 양반 출신들의 ‘뽄새’(보임새)가 절로 묻어난다.
조만간 다시 그를 찾고 싶다. 천렵에 막걸리도 유혹적이지만 아무래도 그의 문경 식 꺾기 노래가 귓전에 맴돌기 때문이다. 세월 탓에 그때 그 시절만큼 절박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의 ‘문경새재 아리랑’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힘들었던 70년 한지 제조 세월 가운데서도 특히 간난했던 소년 시절이 첩첩산중과 오버랩되며 한 자락 슬픔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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