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평생을 바쳐 정원을 만들다 -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본문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빈 땅에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나는 그 나무를 관찰하며 하나의 존재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나무와 대화하며 마음을 나눌 것이다. 나무를 더 심어 숲을 이루면 나의 세계도 덩달아 깊고 넓어질 것이다. 숲이 많은 영감을 줄 것이므로.”
꽃과 나무를 키우며 정원을 가꾸는 일은 우리 모두의 로망일 터이다. 우리는 그 정원에서 땅과 나무의 영혼을 접하며 자연의 섭리를 발견하고 삶의 통찰력을 얻을 것이다.
54년 동안 정원에 나무를 심고 가꾸며 나무와 동심일체를 이루어 온 인물이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현경면 저지리에 사는 성범영1939~ 선생이다. 그의 정원은 좀 크다. 무려 1만 3천 평이나 된다. 언덕과 연못, 폭포가 있고 길들이 여러 방향으로 나 있고 꽃과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돌담과 돌문, 돌다리, 연자방아 징검다리, 돌그네, 돌하르방, 돌조각, 비석들도 보인다. 제주 특색이 물씬 풍긴다. 모두가 제주의 돌 현무암을 사용해 1~4년의 시간을 들여 만든 것들이다. 그는 이 정원 건설에 평생을 몽땅 쏟아부었다. 정원은 그의 분신인 셈이다.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만의 창작품이다.

국가지정 민간정원이자 대한민국 대표 정원인데도 필자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2022년 2월 9일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입구로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공간이 시야에 나타났다. 어느 왕국의 성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성의 주인 성 선생이 맞아주셨다. 백발이 성성하고 눈썹도 하얗게 세었지만, 눈빛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전지용 가위와 상처 봉합제를 들고 가지 치기 작업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무에 정을 주면 그 몇십 배로 되돌려 받지요.”

나무를 돌보면 나무도 내 생각의 뿌리에 물을 준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생활 태도는 물론이고 멀리 내다보는 기획력과 인내하는 마음, 창의력과 미감, 겸손하고 정직한 심성 등을 얻게 된다는 지론이다. “예술과 덕은 그 울림의 깊이가 같다.”라는 ‘덕예쌍형德藝双馨’에 다름 아니다. 설명을 들으며 팽나무, 등나무, 구상나무를 차례로 지나다 향나무 아래에서 멈춰 섰다. 8백 년 묵은 노목이다. 지지대가 비스듬한 자세를 부축하고 있다. 오래전 경상북도의 명망가에서 옮겨 온 나무이다.

“나무 주인이던 90세 할머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워하셨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나무였으니까요.”
가지를 쳐주고 잎을 솎아내 나무가 낯선 땅에 착근하기를 도왔다. 뿌리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위가 가벼워져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 옮겨 심는 데도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나무에 삶을 투영하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게 됐다.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에게는 나무마다 저만의 모습이 따로 있는 걸 관찰하는 일이 큰 공부이고 즐거움이다.

매일 스스로 잎새를 수북이 떨어뜨리는 담팔수 나무는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순환할 수 있어야 생존한다는 걸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주목은 실처럼 가는 뿌리로 성장을 더디게 설정하고는 모든 요소를 가동해 활력소를 만들면서 천년을 산다. 가장 아름다울 때 통으로 툭 떨어져 버리는 동백나무도 절제의 미덕을 깨닫게 한다. 목질 부분이 썩어버려 표피만 남은 매화나무는 그 덕에 속이 넓어졌다. 그 나무를 보며 그는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추스르곤 한다.
“사람도 속이 썩다 보면 마음이 넓어지겠지.”

정원은 모두 8개의 테마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 환영, 영혼, 영감, 평화, 철학자, 향나무, 감귤, 비밀 등의 주제를 반영한다.
하귤, 왕귤, 금귤, 당유자 등 제주의 감귤나무와 맹종죽, 야자수는 남국의 특색을 물씬 풍긴다. 수백여 종이 되는 나무 가운데서 그가 가장 예쁘게 여기는 나무는 소나무나 주목, 향나무가 아니라 ‘꽃을 피우는 나무’이다.
“꽃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눈물겨운 생존의 결과입니다. 1월에 화사한 꽃을 피우는 능수매화나무를 보세요. 새 가지가 난 자리마다 주름이 져 있어요. 꽃 한 송이, 잎 하나를 피우기 위해 온몸의 진액을 뽑아 올리는 까닭이죠. 우리들 사는 모습과 닮지 않았어요?”
모든 존재가 보이지는 않지만, 저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경이로운 희열이 아닐 수 없다.

봄이 오고 있는 정원을 보면서 성 원장은 “만물이 요동치는 걸 느낀다.”라고 말한다. 꽃과 나무들이 저마다의 생명을 구가하기 위해 고요 속에서 준비하고 계획하는 게 느껴진다는 뜻일 게다. “나무들이 꽃봉오리를 벌리는 순간은 짧지만, 나의 마음은 오래 묵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법정 스님이 마지막 법문에서 하신 말씀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펴서 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싹을 틔우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하셨나요?”가 그의 얼굴에 겹친다.
돌을 쌓아 제주 오름처럼 만든 카페에 마주 앉아 원두커피를 마시던 필자는 처음 이곳에 정원을 만들기로 한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곳 출신인지’를 물었더니 그는 의외로 경기도 용인 사람이라고 했다.

“제주와 인연을 맺은 건, 1962년 군을 제대하면서였어요. 우연히 한라산과 천지연폭포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는 가보고 싶어 졌었죠.”
제주 출신 군대 친구에게 안내를 부탁한 후 목포까지 기차로 가서 다시 연락선을 타고 제주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제주의 이국적인 풍광은 경이 그 자체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제주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곳에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그는 미군 PX에서 와이셔츠를 가져다 파는 노점상을 하다 무교동 수송동 가게 운영을 거쳐 가장 고급 쇼핑지였던 반도 아케이드에서 주한 외국인을 주 고객으로 맞춤 와이셔츠를 제작해 돈을 잘 벌고 있었지만, 첫눈에 반해버린 제주에 꽂혀버린 후 미련을 접지 못해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1968년이었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발품을 판 끝에 이곳 땅을 구입하고 정원 건설에 들어갔다. 한라산 중산간이지만 평평한 편이어서 나무를 키우기 좋겠다 싶었다. 당시 이 일대는 전기도, 수도도 없이 빗물을 식수로 삼던 가난한 황무지였다. 제주가 제2의 고향이 되던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낯설고 척박한 섬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듯싶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돈 잘 벌던 서울을 떠나도록 추동했을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와이셔츠 제작하느라 건강도 많이 상한 상태였어요. 도시의 삶이 갈수록 싫어졌죠. 이미 제주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라 더 그랬을 거예요. 바람이 든 거죠. 제주 바람.”
그 바람은 거세게 불어 닥쳤던 모양이다. 완전히 짐 싸서 내려올 때까지 30번을 다녀갔을 정도였다. 상사병이 난 상태였다. 드디어 제주로 옮겨온 첫날, 그는 감격에 겨워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여관방에서 자는데 가슴이 울렁거려 잠이 안 오더군요. 여기서 나무 키우고 살 수만 있다면 어떤 고생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자기 정원을 갖고 싶었을까.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절실하게 만들었을까. 그 배경에는 소년 시절에 겪은 마음의 응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렸을 때 집 근처에 멋들어진 정원을 갖춘 집이 있었어요. 한학을 공부하던 노 선비 댁이었는데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죠.”
꽃들이 만발하고 푸른 잎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던 그 공간은 소년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소년은 그때 다짐했다.
“나도 언젠가 나만의 정원을 갖고야 말겠다.”
3천 평 규모의 정원을 조성하자 그도 그 옛날의 정원 주인처럼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 그러다가 1992년에야 비로소 빗장을 풀고 <분재 예술원>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그의 정원 가꾸기를 지켜보던 한경면 면장과 북제주군 군수가 ‘지역 볼거리로 유일하니 공개하면 어떠냐’고 의사 타진을 거듭 해 온 까닭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관의 요청은 집요했다. 제주도청도 나서 ‘관광지로 허가를 내주겠다’며 설득하고 나왔다. 관광자원이 없다는 지역 현실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결심했다.
“그렇다면 최고를 만들자!”
‘나만의 정원을 만들어 혼자 즐기겠다’는 당초의 생각은 공동체의 이익을 창출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그때부터 그의 정원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서 서로 사랑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창의적이며 실험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성 원장은 정원에 제주 특색을 불어넣고 싶었다. 돌담과 오름이 모티브가 되었다. 바람 거센 제주에서는 돌담이 없이는 모든 게 날아가고 만다. 오름은 제주의 기본 형상이다. 현무암으로 만든 연못 위 아치형 다리는 외국 정원 디자이너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길을 걷다가 그가 가위를 모과나무에 들이댔다. 순이 돋기 시작하는 모과나무의 가지들을 쳐내는 손놀림이 민첩했다. “이거 보세요. 말라죽었잖아요?” “모과나무 분재는 애들 키우듯이 돌보지 않으면 이렇게 자랄 수가 없어요. 손이 많이 가지요.” 그는 매일 천여 그루의 나무들을 살피고 가다듬는 게 일과이다. “대구에서 가져온 모과나무인데 뿌리를 잘라서 가져와 거꾸로 심어 접을 냈지요.”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분재나무들을 끔찍이도 아낀다.
분재는 성 원장이 정원의 또 다른 특색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의 정원에는 모과, 소사, 동백, 유도화, 사과, 배, 홍 괴불, 매화, 느릅, 육송, 해송, 주목 등 다양한 분재나무가 도열해 있다.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혹 느릅나무였다. 1970년 대 결혼을 앞둔 마을 청년이 급하게 돈을 빌려간 후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라는데 돌에 붙어 자라고 있어 성 원장의 이목을 붙잡았다. 가지가 없던 놈을 땅에 심어 가지를 받고, 철사걸이를 해서 가지의 방향을 잡았다. 화분에 옮겨 심은 후에도 가지 만들기를 계속했다. 지금은 뿌리가 돌을 뚫고, 씨앗이 돌 틈에 붙어 자라 돌을 껴안고 있어 돌과 나무의 경계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성 원장의 보살핌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게 한다. 분재나 조경을 공부한 일이 없던 성 원장이 열정 하나만으로 이뤄낸 결과여서 놀라움을 준다. 자료를 찾고, 책을 읽고, ‘분재 대국’이던 일본 견학을 다녀온 게 공부의 전부였다. 1970년 대에 300년 역사의 일본 율림공원에서 분재나무들을 대하고선 넋을 잃었다.
“내게 우주를 준다 해도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들과 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을 흉내 내되, 자연보다 훨씬 아름답게 가꾸는 분재를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일본에서 그가 받은 가르침은 분재기술보다도 ‘천시지리인화天時地理人和’ 여섯 글자였다. ‘하늘의 천기를 받아 흙 속에 뿌리를 내린다. 자연의 시련을 겪지만, 참고 주변과 조화하며 삶을 이룬다’는 내용이었다. 인간은 분재가 자리 잡도록 마음을 쏟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깨우침이었다. “일본을 앞설 지혜를 달라.”는 그의 기도에 대한 답이었다. 그 후 그는 몸과 마음을 나무에 빼앗기다시피 하는 삶을 살았다.
분재는 1600년 전 중국에서 시작해 800년 전 인도로 건너가 널리 퍼졌다. 동경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이 세계화하면서 일본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기간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전통문화를 깡그리 파괴하면서 분재 원조국의 지위를 내던져버렸다.

성 원장의 정원은 제주 특색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놀라운 결과들이었다. 정원의 이름을 ‘생각하는 정원’으로 바꾼 데도 그런 생각의 변화가 반영됐다.
“제대로 된 설계도도 없이 나 혼자 생각하며 만든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생각 끝에 진로 수정도 많이 했지요. 생각을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도태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재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나무를 억압한다고 생각들 하잖아요? 분재에 철사를 감는 걸 두고 하는 얘길 거예요. 수형을 교정하는 데 잠시 사용할 뿐인데, 그걸 식물을 억압하는 행위로 여겨요. 분재가 잔인한 짓이라면, 분재 나무의 수명이 어떻게 그리 길겠어요?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잎을 솎아주고 뿌리를 잘라주고 가지치기를 해줍니다. 그러면 나무는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며 더욱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는 게 분재죠.”
그는 분재 나무에서 사람을 본다.
“많은 고통과 싸워 이겨낼수록 나무 수형이 격을 갖춥니다. 시련을 겪으며 끊임없이 경쟁력을 높인 사람이 성공하는 것과 닮은 거죠.”
돌밭에 대 정원을 건설하는 과정이 험난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연못 공사는 땅을 파는 데만 40여 일이 걸렸다. 굴착기도 애를 먹었다. 파낸 돌 위에는 외부에서 들여온 흙을 덮어 오름을 만들었다. 돌담은 돌을 일일이 다듬고 시멘트를 발라 쌓아야 했다. 제주의 바람을 견디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돌을 드느라 허리에 무리가 가고 돌담 위에서 작업하다 15차례나 크게 다치는 바람에 허리에 3개의 핀을 박고, 양 어깨와 무릎을 합쳐 모두 7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나무 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돈이 생길 때마다 제주는 물론 전국에서 나무를 구해와 심었지만, 돌자갈밭이었던 땅에서 나무들이 뜻대로 자라주었을 리 없었다.
“숱한 나무들이 죽어나갔어요. 나무마다 성향이 다르니 키우는 방법이 다 달랐죠. 시행착오를 수 없이 겪었어요. 특히 분재는 섬세해서 더 힘이 들었죠. 하루 15시간을 일해도 모자랐어요. 한여름에는 잠시 한눈만 팔아도 땡볕에 잎이 타들어갔고, 나무에 물 주는 시간만 5~6시간이 걸렸어요. 아내가 생고생을 했지요. 정원 일에다 인부들 밥 세 끼에 새참 두 끼까지 해 날랐고, 생업으로 돼지까지 키웠으니까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늘, 살 수 있는 힘을 주세요!’가 아내의 매일 기도였어요.”
바람 거센 제주의 날씨도 악조건이었다.
“제주에선 바람 막는 일이 나무 기르기의 전부더군요. 담을 높이 쌓아두지 않으면 나무들이 죄다 동상에 걸려버려요.”

제주도는 워낙 원주민들의 텃세가 심한 곳이다. 육지와 다르게 차별받고 핍박받았던 슬픈 역사 탓이다. 성 씨의 작업을 곱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다들 ‘두루외(미친놈)’라고 하더군요. 자갈밭 일군다고. 날씨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하니까 나더러 ‘사람 몇 죽일 놈’이라고들 했어요.”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웃인데도 타지에서 왔다고 도와주기는커녕 욕하고 배척했어요. 가난이 덕지덕지 붙었는데도 일할 생각들을 안 해요. 그저 잔칫집이나 초상집만 쫓아다니더군요.”
그는 정원을 지으려다 마을의 가난을 구제하는 게 급하다고 생각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파도 굿만 했어요. 결국 사람이 죽어나갑디다. 미신으로 꽉 찬 마을이었어요. 돈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걸 보면서 ‘가난을 벗어나려면 종잣돈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락교회의 도움을 받아 신협을 열어 대출을 해줬죠.”
그들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노동을 시작한 덕분이었다. 이웃 타관받이 덕에 근로윤리를 익힌 것이었다.
“‘100년을 해봐라. 그 자갈밭에서 뭐 나나’라며 비웃던 이웃들이 담 너머로 내가 일하는 거 보고선 자기들도 따라 하기 시작하더군요. 몇 년씩 버려둔 땅에 밀감나무를 심고 채소를 심었어요. 지금은 밀감 농사로 연간 수억 원씩 벌죠. 제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됐어요.”
자신을 위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자갈밭을 갈던 그가 무기력한 이웃을 위해 사는 법을 깨우쳤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나 보람을 만끽했다.
관공서의 불친절도 성 씨를 힘들게 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때도 공무원들이 엄청 배타적이었어요. 제주 방언 못하면 창구에서 상대를 안 해주고, 건물 설계도 육지에서 해왔다고 집어던졌어요. 그 설움에 비하면 몸 고달픈 건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런 고난에 굴복하기에는 ‘나만의 정원을 갖겠다’는 그의 소망이 워낙 컸다. 나무들이 자라나자 힘이 절로 났다.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나무들과 푸르게 변해가는 황무지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군요. 밀감이 열리고, 소철이 뿌리를 내리고, 야자나무 묘목들이 자리를 잡았어요. 옮겨 심은 분재들도 저마다의 수형을 뽐내더군요. 태어나서 가장 크게 맛 본 희열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정원이 지자체의 자랑이 되었으니 성 씨로서는 금석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갈밭이 정원으로 변신하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개방을 한 후 성 씨는 해마다 정원을 넓혀 나갔다.

코로나 전에는 내국인은 물론,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였다. 길가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 중국 주석들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비석들이 눈에 띈다. 중국 지도층 인사들은 제주에 오면 필수 코스처럼 이곳을 방문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 원장의 개척정신에 감동했다. 95년 이곳을 방문한 장쩌민 주석은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황무지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일군 무명 농군의 개척정신”에 경의를 표했다. 개혁개방으로 발돋움하려던 당시 중국에 필요한 정신이었다.
“판정이 <인민일보> 총편집장이 수교되고 석 달 뒤인 92년 11월 17일 자에 ‘신병매관기新病梅館記’라는 이곳 견학기를 쓴 게 계기가 됐어요. ‘병매관기’라고 꽁쯔쩐1792~1841이라는 청淸 대 문학가가 쓴 글이 있는데, 인성을 왜곡하고 짓밟는 청 왕조의 폭정을 왜곡당한 매화분재로 상징해 비판한 글이었지요. 그런데 우리 정원을 보고 충격을 받은 거예요. ‘분재가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도록 교정하는 예술임을 깨달았다’는 거죠. 그 글을 읽고 장 주석이 95년에 전격 방문하게 됐던 거였어요.”

장쩌민이 다녀간 뒤 초대 주한 중국대사이던 장팅옌이 공청단 500명 단원을 이끌고 견학을 온 데 이어 주룽지 전 총리, 츠하오티엔 전 국방부장, 리쟈오싱 전 외교부장, 후진타오 당시 부주석, 시진핑 당시 저장성 서기 등 중국 지도부 인사 6만여 명이 줄을 이어 다녀갔다. 중국 여행 중에도 국가안전부장, 공안국장 등이 비밀리에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중국에서 일약 유명인사로 부상해 북경대, 남경대 등에서 100여 차례 초청 강연을 가지기도 했다. 중국은 2015년 그의 이야기를 중학교 3학년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소개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계몽적이고 애국적인 인물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성 원장을 ‘한국 우공’이라 호칭했다. ‘치수治水를 위해 산을 옮겼다’는 중국의 고대 우공愚公에 비유한 것이다. ‘노력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는 뜻을 담았다.
중국의 성 원장에 대한 평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2006년 중국 방문 때 성 원장이 천안문 광장 주변 가로수들의 관리 부실을 지적하자 당기관지 인민일보는 즉각 ‘초목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가?’라는 사설을 게재했고, 장쩌민 주석의 고향인 양저우揚州의 대표 정원 하원何園의 보수 과정을 보고 성 원장이 조경 문제점을 지적하자 다 파내고 수십억 원을 들여 재보수한 일화도 있다. 2007년 국책기관인 중국 외문국대외전파연구중심外文局對外傳播硏究中心이 펴낸 <한일 국가 이미지 부각과 형성韓日 國家形狀 形成>에는 한국을 돋보이게 한 존재 4개 가운데 하나로 ‘사색정원思索庭園’을 꼽았다. 포항제철소가 포함되어야 마땅했지만, 1990년 대 덩샤오핑 시절 이미 벤치마킹했던 터라 중국이 한국에서 부러운 건 성 원장의 <생각하는 정원> 하나밖에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성 원장을 흠모하고 존경하다 못해 경외감을 표한다. 그의 창고에 보관된 진귀한 선물들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그 어떤 인물도 받지 못한 내용의 예물들이다. 그는 이 진귀한 선물들을 상설 전시할 생각을 갖고 있다.
나무가 맺어준 인연들은 중국 지도자들 외에도 많다.
“분재에 조예가 깊은 레이니 전 미국 대사는 ‘분재대국인 일본에서도 보지 못한 작품들을 여기 와서 보게 됐다’며 극찬했죠. 장 폴 레오 전 프랑스 대사는 네 번이나 다녀갔고, 2000년엔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 2017년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왔었어요.”
북측 인사들도 방문했다.
“2000년에 김용순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 왔었죠. 모두들 나더러 애국자라 부르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군요.”
나무를 심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이념이나 체제가 틈입할 새가 없었다. 성 원장은 나무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본다. 제때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듯, 리더도 때를 놓치지 말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개혁을 단행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뜻에서이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는 1998년을 꼽았다. 그해에 찾아온 IMF는 그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두 달간 대출 이자를 내지 못하자 거래 은행은 즉각 차압에 나서 경매처분을 결정했다. 외지인에 대한 제주도의 배타성이 작용한 탓이었다.
“정원을 헐값에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믿었던 지인들이 거래를 부추기며 중개인 노릇을 하더군요. 결국 경매됐었죠.”
마음을 많이 다쳤지만, 성 원장은 굴하지 않고 7년의 노력 끝에 정원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렀다.
“54년간 정원 만들고 다듬는 데 몰입하셨는데, 자신의 삶이 이 정원에 갇혀버렸다는 느낌은 가져보신 적이 없는지요?”
성 원장이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아뇨.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여기서 정원을 만들고 있을 겁니다.”

맨몸으로 척박한 땅을 일궈온 성범영 선생의 지난날은 19세기 미국 카우보이들의 서부 개척사를 연상시킨다. 카우보이들은 자기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그들 개개의 인생사가 미국의 번영을 이루어나갔다. 바람 거센 황무지에서 묵묵히 정원을 건설했을 성 원장의 세월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그의 금자탑 ‘생각하는 정원’이 오래도록 제주를 이루는 자랑거리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낸 시간들은 그 자신을 넘어 이웃들에게도 긍정적 작용을 미치며 하나의 교훈으로 남았다. 나무를 심고 가꾸듯 성실하고 지혜로운 자세가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가르침을 말함이다. ‘나만의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성범영 씨의 소박했던 꿈이 공동체의 발전을 견인하는 레벨로 커지고 넓어졌다. 처음부터 그가 계획했던 진로는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나무를 아끼며 대하는 그의 심성이 이웃의 삶에도 작용했을 것이라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그가 손을 이끌더니 꼭꼭 숨겨놓은 또 하나의 정원을 공개했다. “이런 공간이 숨어 있었다니!” 필자는 경이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3백 평쯤 돼 보이는 공간은 높은 돌담으로 가려져 있다. 현무암 폭포와 동굴, 그것들과 연결된 연못 위 징검다리와 공연 무대, 벙커 같은 방과 의외의 장소에 만들어진 화장실이 탄성을 자아낸다. 석조 팔각정에서는 멀리 바다도 조망된다. 그의 아이디어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환상적 공간’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라며 촬영도 못하게 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필자는 해질 무렵이면 남녘을 바라보며 오늘도 그 위로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스쳐 지나갔을 성 원장의 노동하는 어깨를 떠올리곤 한다. 54년 전 한 개인이 품었던 열망이 정원이라는 하나의 형상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이웃의 삶을 나아지도록 견인하는 동력으로 역할했음도 떠올린다. 그는 중국 친구들에게서 받은 진귀한 선물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킬 바람도 추진 중이다. 바깥에서는 격찬을 하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 정원을 감동이 있는 ‘K- Garden’으로 만들 수 있어요.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여 한국을 먹여 살릴 콘텐츠로 만들 자신이 있어요.”
실제 유수한 여행 웹 사이트인 트립 어드바이저Tripadvisor는 <생각하는 정원>을 ‘여행자의 선택지Travelers’ Choice 1위로 올리고 있고, 러시아에서도 선호 관광지 1위에 랭크돼 있다. 15번을 왔다 간 워싱턴 DC 분재박물관장도 있다. 캐나다-인천공항-제주도가 그의 매회 방한 일정이었다. 중국은 이곳을 “유일한 한국 볼거리”로 여기고 있다. 그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코로나가 풀릴 날을 학수고대한다.
정원 방문을 마치며 ‘대한민국은 성 원장의 업적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성취물이 한 개인의 삶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공익적 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성범영 선생의 54년 세월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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