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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거침없고 막힘없이 신라를 그린다 -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 본문

거침없고 막힘없이 신라를 그린다 -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

gubo54 2022. 8. 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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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21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1945~) 화백의 개인전 정관자득(靜觀自得: Insight)’을 보았다. 도자기 그림들과 글씨, 수묵 풍경화들이 지하 1층서부터 지상 2층까지의 벽면을 점하고 있었다. ‘고요한 시선으로 사물을 보며 나름의 인식을 얻는다 정관자득은 주변 요소에 좌우되지 않는 나만의 심안心眼을 강조한다. 작가도 격랑 속에서는 물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법이라고 언급한다. ‘고요는 철학에서 익숙한 나의 시각을 버리는 지점을 일컫는다. 관성이 다른 방향으로 운동성을 보이려는 순간의 상태를 말한다.  고요에서 창의성과 역발상이 생겨난다. 무리 가운데 하나로서의 나가 아닌, 당당한 주체로서의 내가 탄생한다. 동족이 일본군의 칼에 참수당하는 영상을 접하고도 무표정한 동료들을 목도한 유학생 루쉰魯迅, 1881~1936이나 고라쿠엔 야구장에서 투수의 공이 타자의 배트에 맞아 경쾌한 소리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가 그 고요의 순간을 경험하고 자신의 삶에 일대 변화를 가한다. 루쉰은 일본 센다이 의대를 자퇴한 후 정신혁명을 표방하는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고, 하루키는 그 길로 문구점으로 가 원고지와 만년필을 사서는 음악카페 사장에서 소설가로 변신한다. 소산이 부감으로 표현하는 수직 원근법 역시 고요 속에서 터득한 그만의 기법일 것이다.

주말을 맞아 소산에 대해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 상황임에도 관객들로 붐비고 특히 젊은 층들이 많이 찾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최근 공개된 삼성 이건희 회장 컬렉션에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관심을 끈 게 아닌가 짐작됐다.

 

지난 5월 경주에서 소산을 만난 기억이 오버랩된다. 그는 경주시 삼릉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삼릉三稜의 마사토 길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그를 숲길 입구에서 기다려 만났다. “그동안 왜 연락이 뜸했느냐?”며 타박부터 준다. 머리를 짧게 깎아서인지 더욱 날씬해 보인다. 다이어트 중이라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벼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라고 말한다. 늘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사는 사람답다고 느낀다. 삼릉과 바로 연해있는 그의 아틀리에에서는 여전히 묵향과 차, 와인의 냄새가 배어난다. 50여 평 공간의 벽에 가로 4.5m, 세로 2m 크기의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세 번째 불국사 설경이다. 그는 눈 내린 불국사에서 아름다움의 완성을 본다. 불국佛國을 정토淨土로 만드는 순백純白의 영향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라고 혼잣말처럼 말한다. 소산의 불국사 시리즈는 모두 여덟 점이다. “김대성이 짓고 박대성이 그리니 대성大成이라는 이름이 인연 속에 있는 것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인 751년에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세웠다. 천 년 여의 시간을 격한 채 두 신라인이 교감하는 것이다.

불심이 깊은 소산은 원효(617~686)와 만해(1879~1944) 두 스님을 존경한다. 두 분 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각本覺에 눈길을 주었다. 경전에 독자적 해석을 더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자유로우면서 조화로운 무애無碍 원융圓融의 세계를 펼쳐 보였던 분들이다.

 

소산이 작업하는 걸 지켜볼 때마다 불편한 몸으로 대작을 그리는 모습에 늘 경탄하곤 한다. 소산은 1949 빨치산의 낫에 한쪽 팔을 잃었다. 그가 불편당不便堂을 호로 삼고, ‘불편을 즐기자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연유이다. 상실한 왼쪽 팔은 남들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하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만의 창작 세계가 형성된 배경이다. 신망 높은 한의사이던 부친은 반동 지주라는 죄목으로 그때 처형됐다. 7남매의 막내이던 소산은 그 후 장형과 형수에 의탁해 자랐다. 막대기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낙을 삼았다. 지방 쓰려고 오려놓은 한지 위에 병풍 그림을 흉내 내 그리기도 했다. 소년 시절 그의 그림은 수묵화든 뭐든 혼자서 따라 그리는 것이었다. 교육이라곤 18살 때부터 5년간 부산의 서정묵 선생에게 사사한 게 전부였다. 서 선생에게서 사군자와 미인도 등 동양화를 배웠다. 23살에 <가을>이란 산수화로 17회 국전에 입선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은 젊은이가 국전에서 인정을 받은 까닭이었다. 소산은 이후 8번이나 연속으로 입선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상림霜林>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자력으로 지명도를 얻으면서 주목을 받자 이영찬, 박노수 등 화단의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궁금한 것을 묻고 배우는 시간들을 가졌다. 이런 노력으로 소산은 점차 단단한 실경 묘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이던 박노수1927~2013 화백의 영향이 특히 컸다. “남의 밥은 빌어 먹어도 정신은 오롯이 자기 것이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이었다. 남의 그림을 흉내만 내지는 말라는 당부였다. 소산은 비로소 모방 방식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시작한다. 1974년 주변의 주선으로 기회를 얻은 타이완 유학이 도움이 되었다. 1년 동안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관에서 하루 두 점씩 명화를 보고 배우는 전문 코스 과정이었다. 이 시기에 소산은 관찰의 중요성을 터득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세계에 본격 입문한 것이다. 1988년에는 외교 수립도 안 돼 있던 중국을 돌며 스케치 여행을 했다. 1994년에는 현대 미술Modern Art’을 알기 위해 뉴욕의 소호Soho를 찾았다. 동서양의 여행을 통해 소산은 그들에게서 배울 건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한국적인 것에 바탕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자각을 얻기에 이른다.

 

소산은 94년부터 불국사에서 1년을 기거하며 불국사의 풍경을 연작으로 그렸다. 김환기1913~74가 다녔던 뉴욕 소호의 미술 학원에 등록해서 수업을 받다가 두 번 등교한 후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곧장 경주로 내려가 있을 때였다. 뉴욕 체류 기간이 짧았던 것은 그곳에서 오히려 경주를 그리워했던 까닭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상에 이미 신라가 들어와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운 대상은 멀리 떠나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소호에서 불국사를 떠올린 것이다. 자신의 그림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찾는 순간이었다. 소산은 나에게 현대 미술은 붓과 먹으로 경주를 그리는 것’”이란 결론을 내린다. 무턱대고 불국사로 쳐들어가서는 방을 내놓으라고 주문한 일화는 소산의 그림 철학을 보여준다. 머물며 오래 지켜보지 않은 채로는 대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고 여긴다. 11세기 북송北宋의 화가 쿼시郭熙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언급한 가행자可行者가 아닌 가거자可居者의 태도에 다름 아니었다. 불국사의 대웅전에 서서 보름달이 비추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고선 심장이 멎을 뻔 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소산은 불국사에 빠졌다. 달만큼이나 눈도 불국사의 신비를 더해주었다.

 

<적설>은 볼 때마다 먹먹해진다. 눈을 뒤집어쓴 불국사가 화폭의 위 절반을 차지하고 아래는 온통 백설이다. 아득히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귀 기울이면 바스락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하늘이 어둡게 처리돼 있고 눈밭에 발자국이 없는 걸로 봐서 새벽 시간대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눈 내린 새벽에 절간을 다녀가는 사람은 사연을 안고 있게 마련이다. 간절한 기원을 빌고 가는 것일 게다. 절과 눈과 여인 사이에 많은 스토리가 숨어 있을 터이다. 정작 소산은 여인이 아니라 비구니 스님을 그린 것이라며 웃는다. 필자에게는 스님이 아닌 세속의 여인으로 설정하는 스토리텔링이 더 나아 보인다. 작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오롯이 관객의 차지가 된다.

 

소산을 처음 뵌 건 1997년 무렵이었다. 평창동에 거주하며 수묵화 그리기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직접 설계해서 지은 집은 멋이 있었다. 특히 잔디밭과 연결된 사랑채가 시선을 빼앗았다. 작업실은 2층 공간 전체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집을 지으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으며 그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쏟아부었는데도 공사가 끝나지 않아 급기야 소장하고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들을 팔아 충당했다. 한점 한점 내다 팔 때마다 힘들게 구입한 귀한 것들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림이 팔릴 때마다 아깝다 여기지 않고 사들인 사연 많은 존재들이었다.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서 그 작품들과 재회하면서는 떠나보낸 옛 연인을 만난 것처럼 미안하고 마음이 쓰렸다. 이윽고 그는 결심한다. “추사를 갖지 못 할 바에야 내가 추사가 되자

그의 추사에 대한 존경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때로는 자기를 추사에 투영하기도 한다. 그가 추사체를 감쪽같이 흉내 내는 연유이다. 수묵화 화가지만 서예전도 여러 번 가졌을 정도로 그의 글씨는 대단한 경지를 보인다. 2018년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가진 전시회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과 추사의 글씨를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글씨는 옛사람들의 솜씨를 임서臨書하는 연습을 통해 획득한 것이었다. 눈만 뜨면 추사를, 김생을 따라 썼다. 물론 천부적인 재능이 따를 때의 이야기이다. 중국 모택동1893~1976의 힘 있고 날렵한 서체를 그대로 임서한 글씨는 2011 5월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에서 중국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몇 년 사이에 그는 끝없는 시도를 통해 어느 체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만의 서체를 창조해 놓고 있었다. 전서체의 멋이 담긴 글씨였다. 필자가 “‘소산체小山體가 탄생하겠다라고 언급하자 말없이 웃기만 한다. 실로 김생과 추사의 현신現身이라 부를 만하다.

 

2021 3월부터 6 20일까지는 경주 솔거미술관에서 특별기획전 서화書畵, 조응調應하다를 열었다. 한국화에서 글과 그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조형의 아름다움이 소산의 작품을 통해 조명됐다. 이 전시회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는 소산의 넉넉함과 유유자적을 알게 한다. 경북 봉화군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에 새겨진 김생711~?의 글씨를 그대로 임서해 20m 길이로 늘어뜨린 모양으로 전시했는데 구경온 아이들이 훼손해버렸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처럼 여겼는지 작품을 밟고 그 위에 드러눕고 구르며 망가뜨렸고 아이들 아버지는 방관한 채 사진을 찍었다. 당황한 미술관 측이 소산에게 어찌하오리까를 자문했는데 소산은 아이들이 그럴 수 있다 문제 삼지 말라고 당부했다. 소산은 오히려 고놈이 내겐 봉황이다라고 말했다. 그 일화가 “1억 작품 훼손”, “거장 용서하다”, “그게 애들이지 뭐 등으로 포털에 소개되면서 유튜브에서 2백만 번 넘게 조회되었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ting’ 역할을 했다고 여기는 투다. 이미 대가의 경지에 오른 소산의 작품이 그 정도의 우연성 홍보에 의존할까마는 그 일화 덕에 전시회가 새삼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일지 모르겠다. 소산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은 아이의 전시회에 대한 기억이다. 철부지 장난으로 작품을 훼손해 부모가 보상을 해야 한다면 아이의 미술관에 대한 인상은 트라우마로 남을 터이다. 소산은 그보다는 관람 문화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낸다. “아이들 장난질보다 아이 아버지가 조심하고 제지했어야 옳았다라는 것이다.

 

2001년 소산 박대성 화백은 서울을 떠나 경주에 터를 잡는다. 오롯이 신라를 호흡하고 그리기 위해서였다.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남산 계림과 담장 하나를 격한 곳이었다. 아뜰리에에는 갓 잡은 잠자리며 여치가 스케치를 위해 유리병 속에 갇혀 있었고, 강아지가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을 잡아먹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던 기억이다. 이곳에서 그는 관조의 미학을 터득한다. 담장 너머 소나무 한 그루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줄기와 가지, 잎에 이르기까지 시선을 주다 어느 날 화지를 앞당겨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소나무를 그려버렸다. 옛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흉유성죽胸有成竹의 경지였다. ‘마음속에 대나무를 심고 키운다는 뜻으로 대상과 한 몸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또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의 상태를 이르기도 한다. 소산의 고백으로는 소나무는 잎을 표현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물아일체의 상태에서는 소나무가 소나무를 그리는 격이어서 힘든 게 없어진다.

구조물에서도 자연에 대한 그의 관조를 느낄 수 있었다. 계림과의 담장 곁에 황토방을 마련하고 지붕에는 유리창을 달아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하룻밤을 투숙했던 4월에는 달과 매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梅花看月.

그곳에서 꿈을 꾸며 이웃한 계림에 담겨있는 신라 천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색 경험을 했다. 남산의 소나무와 돌부처 사이를 새와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실제 남산에는 이름 모를 석공들이 조각해놓은 돌부처들이 많다. 낮에 본 인상이 강렬했던 까닭일 것이었다. 소산은 이곳에서 매일 신라의 꿈을 꿀 것이라 여기며 부러워했다.

 

2010년쯤 그의 아뜰리에에는 외국인 문화 애호가들이 자주 찾곤 했다. 외국 미술관들이 큐레이터와 수집가들을 모아 떼로 찾아온 까닭이었다. 그가 유럽을 돌며 가진 개인전의 영향이었다. 한국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산의 작업 광경을 지켜보며 한국화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창작되는지를 직접 보았다. 당시 필자는 경주시가 이런 점에 착안해 선생의 집을 관광 상품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경주의 유적지들과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본 까닭이었다. 일본 오사카 근해 나오시마섬에 일본이 자랑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미술관을 만들고, 모네 그림 5점을 비치해 한해 30만 명의 관광객을 흡인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참이었다. 나오시마는 주인이 떠나고 없는 빈 어가들을 아트 하우스로 꾸몄다고도 한다. 통섭의 모델이 관광산업에 도입되고 있던 시기였다. 문화 예술이 콘텐츠를 제공하고, 기업이 후원을 하며, 지방자치단체가 홍보마케팅을 맡는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필자의 바람은 몇 년 뒤에 현실화되었다. 경주시가 2015년 솔거미술관을 지으면서 소산기념관을 따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에 대한 경주시의 존경의 표현이었다. 소산기념관에는 소산의 작품들과 불상, 옛 벼루 등이 찬란했던 신라를 아스라이 재현하고 있다. 기념관 앞 연못을 차경한 통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경주 남산과 불국사를 그린 소산의 그림 두 점이 좌우로 배치돼 있다. 풍경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되고 있다. ‘참새가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는 신라 화가 솔거의 소나무 벽화를 현재화시킨 듯한 구상이다. 소산의 트레이드 마크인 상하 원근법으로 생동감 넘치게 처리한 <현율玄律>, <불 밝힘 굴>과 부처의 고행을 묘사한 <법열>, 경주 남산을 표현한 <천년 신라의 꿈>, 2018년 남북정상회담장에 걸렸던 제주 <정방 폭포>, <성산 일출봉>, <금강 설경>, 하얀 비단을 떨어뜨린 듯 표현된 <장백폭포>, <비룡폭포>와 고향 청도를 그린 <청도 소싸움>  830여 점이 압도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필자는 <古寺>, <만추> 등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쓸쓸함을 감지한다. 글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진 채 새벽 녘 古家에 조응하는 <새벽>도 적막감으로 보게 된다.

 

소산은 묵색을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여겨 왔다. 서양화는 색을 채워야 하지만, 수묵화는 색을 비워야 한다. 그에게 묵색은 이 아닌 현이어서 세상 만물을 다 그릴 수 있는 색”(이은호)이 된다. 흑은 그냥 검지만, 현은 아득히 검다. 우주가 탄생한 지점을 일컫는다. 그러니 그 현으로 표현하지 못할 대상은 없다. 눈은 색을 칠하지 않고 비워두면 표현된다. 소산은 당나라 장옌위앤張彦遠 득의得意를 지향해왔다. ‘득의는 오색五色에 기대지 않아도 화려함을 그릴 수 있는 단계를 뜻한다. 이제 소산은 묵색 일색에 황색을 하나 보탠다. 송림 사이로 떠오른 만월이 석탑을 비추는 <삼릉 비경>은 온 계림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석가탑 앞에 선 나무도 황금색의 빛을 발한다. 잿빛 일색이던 기왕의 그림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원융무애圓融无涯하려는 마음의 발로일까.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은 걸리고 편향됨이 없이 가득하고 둥글게 일체가 된다. ‘득의에서마저 벗어날 줄 아는 정신의 세계를 살고 있는 까닭일 게다. 예술적 변용變容에 다름 아니다.

연기자이자 뮤지컬 배우인 유준상이 소산의 그림들에서 받은 영감을 5년 간의 작업 끝에 작곡한 음악이 실내에 그윽하게 울려 퍼진다. 이채롭다.

 

문득 눈앞에 천년도 더 전 동아시아의 화려한 대도시였던 서라벌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휘황찬란한 불국의 풍경이 거기 있었을 터이다. 오늘날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그때의 흔적들을 둘러본 후 다시 소산의 그림들을 보면, 신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각인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소산의 작품들은 경주를 이해하는 열쇠이자 훌륭한 관광콘텐츠가 될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관광은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갖고 있는 콘텐츠들을 어떻게 재조정하고 배열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은 자기 문화를 외부에 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광고효과이자 홍보수단이 된다. 관광을 이끄는 요소가 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형태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소산이 경주에서 받는 심상心象을 화폭에 옮긴 주제들이다. 평론가들은 소산이 제한을 두지 않는 무애無碍 사상을 설파하며 막힘이 없는 원융圓融의 세계를 추구한 원효대사의 사상을 따르고 있다.”라고 평한다. 추구하는 정신세계로 볼 때, 소산은 신라인의 화신化身이라는 이야기이다. 소산 자신도 신라인을 자처한다. 거리낌이 없는 무애의 신라인. 2010년 정부는 소산에게 문화훈장을 서훈했다.

 

적막이 감도는 경주 남산자락에서 소산은 오늘도 신라를 느끼고 호흡하며 신라의 꿈을 화폭에 옮긴다. 풍경의 언어를 읽는 그 순간, 경주의 빛과 바람은 모두 소산 박대성과 하나가 된다.

 

 

 

 

 

 

 

 

 

 

 

 

 

 

 

 

 

 

 

 

 

 

 

 

 

 

 

 

 

 

玄月圖 - 일명 '신라의 달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