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김치 - 한민족의 지혜 본문
김장철을 맞아 집집마다 배추며 무며 소금이며 젓갈을 장만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짧게는 서너 달, 길게는 일 년치 먹거리를 준비한다. 필자의 집에서도 농협에 염장 배추를 주문하고 양념 속으로 쓸 재료들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스무 포기만 하기로 했다. 4인 식구가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지만 김장에 힘이 들어서이다. 예전에는 11월에 하던 김장을 요즘은 일 년에 서너 번씩 한다. 필자는 갈치나 굴 혹은 새우젓을 넣어 삭힌 김치를 좋아하지만, 올해도 멸치액젓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김장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탓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김치에 대한 추억을 향유하고 있을 터이다. 필자의 경우는 절집에서 만난 김치가 그에 해당한다. 2007년 봄 경상남도 양산의 한 암자에서 수도 중인 조월釣月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스님은 음악으로 삼라만상과 교류하고 있었다. 자신의 음악이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화귀話句가 될 수 있다면 음악을 계속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간화선 대신 음악으로 수행하는 쪽을 택했다. 자연에서 받는 기운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공부 방법이다. 피리, 대금, 퉁소 같은 목관악기는 가위 경지에 다다랐고, 플루트에 대나무를 덧붙여 내는 소리는 플루트 소리보다 청정하다. 33줄 탄공금을 직접 설계 제작해 온갖 사물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가난하나 단아한 그의 불단은 초라하지만 깊은 불성으로 충만하다. 공양 때가 되자 스님이 밥상을 차려주셨다. 반찬이래야 3년 묵은 ‘지(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다른 양념 없이 소금과 고춧가루만으로 담가 묵힌 배추김치였다. 밥상을 보며 문득 옛 기억 한 자락을 떠올렸다. 오래전 불일암에서 보았던 법정 스님의 상차림과 흡사했던 까닭이다.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는 수도승들의 공양은 한결같구나, 필자는 오랜만에 법정 스님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으로 그 공양을 받았다. 꿀맛이었다.
우리 김치는 흔히 김장김치라고 부르는 ‘젓국지’가 일반적이다. 통배추를 소금에 절인 후 사이사이에 속과 젓갈을 넣어 발효시킨 것이다. 이와는 모양이 조금 다른 게 섞박지이다. ‘섞박지’는 절인 배추 김장 속에 군데군데 무를 섞어 박은 김치를 일컫는다. ‘사연지’는 절인 배추에 실고추와 액젓만을 넣어 하얗게 담그는 김치로 흔히 ‘백김치’라 부른다. 밤을 넣어 고소한 맛을 내거나 조기 낙지 굴 등 해산물을 넣어 시원한 맛을 내기도 한다. ‘동치미’는 염장한 배추, 무를 물에 담가 실파, 고추, 마늘, 청각, 생강, 잣 등을 넣고 묵힌 것이다. 시원한 국물이 입맛을 돋운다. ‘싱건지’라고도 부르는 무짠지는 무를 염장한 것이다. 이 염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 지의 맛이 달라진다. ‘싱건지’는 2년, 3년이 지나도 물러지지 않고 단단한 식감을 유지한다. 물김치나 짠지로 내놓으면 여름이나 겨울에도 시원하고 아삭한 맛을 낸다. 결코 다른 반찬에 뒤지지 않는다. ‘동지지’는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배추가 꽃을 피우는 짧은 시기에 꽃대로 담그는 김치이다. 무에 꽃대가 있는 건 알아도 배추에 꽃이 피는 건 잘 알지 못한다.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만 수확이 가능한 만큼 별미가 아닐 수 없다. 이 ‘동지지’는 제주도의 일부 식당에서 비장의 맛으로 꺼내놓는다.
배추나 무 외에도 열무, 순무, 부추, 유채, 겨울초, 미나리, 깻잎, 콩잎, 고추, 양파, 오이, 고들빼기, 갓, 파, 애호박, 돼지감자, 두릅 등이 모두 김치의 재료로 쓰인다.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한민족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제주도 주민들은 ‘마농지’라는 고유의 김치를 갖고 있다. 이 ‘마농지’를 일 년 내내 먹는다. 배추나 무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마늘대를 간장에 담가 장아찌처럼 절인 것이다. 조선 후기에 배추가 유입되기 전에 김치를 담그던 채소들이어서 역사가 오래다. 특히 미나리는 전국에서 재배가 됐을 정도로 염장 반찬의 대표였다. 정조 때 한치윤1765~1814은 《해동역사海東繹史》 ‘자근紫芹’ 편에 명明의 사신이었던 동월이 조선을 다녀가며 주목했던 미나리에 관한 기록을 인용해 “왕도와 개성 사람들은 모두 집의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는다.”라고 언급했다. 미나리가 조선 백성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닿아 있었음을 알게 한다. 동월이 다녀간 성종조(재위 1469~94)에 미나리를 많이 재배한 이유는 이때까지는 배추가 아직 조선에 유입되지 않았던 까닭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가을에는 무로 김치를 담갔지만, 봄에는 미나리 김치를 먹었다.”라고 전해진다.
콩잎과 두릅은 물김치 형태로 만들면 새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면서 여름철 반찬으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돼지감자 깍두기는 아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유채 어린순은 고춧가루 뿌려 겉절이로 무쳐먹어도 좋다. 유채 씨앗을 짜서 만든 유채기름 한 방울을 곁들이면 고소한 향과 맛을 낸다. 필자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셨다. 처음에는 맛이 안 나지만 삭으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매력을 발휘한다. 일기 탓에 배추값이 금값이 되면 대용품으로 안성맞춤이다. 미나리, 고추 등과 함께 물김치를 담가 한 모금 들이켜면 여름철 더위를 멀리 쫓아준다.
양파도 대파 잎과 함께 섞어서 멸치액젓 넣고 양념장 첨가하면 매력 있는 김치로 변신한다. 미끄러운 양파에 양념이 잘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갓이나 열무, 알타리 잎을 썰어서 넣어주면 된다. 감칠 맛을 내도록 발효시키기 위해서는 설탕이 꼭 들어가야 한다.
‘나박김치’는 무의 한자어인 ‘나복蘿蔔’에서 유래했다. 고춧가루가 든 김치국물에 얇고 네모지게 썬 무와 미나리, 실고추를 넣어 담근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유입되면서 기존의 동치미가 모습을 바꾼 것이다. 한 모금 들이키면 시원하기 짝이 없다. 예전에는 속이 뚫린다 해서 소화제 대용으로도 쓰였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잦았던 5,60년 대에는 국물이 가스 해독제로도 애용됐다. 조선시대에는 전염병 퇴치에도 이 나박김치 국물이 동원된 웃지 못할 기록이 <중종실록>에 보인다.
지방마다 김치를 담그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욕지도 사람들은 김치를 담글 때 볼락을 집어넣는다. 여수에서는 갈치를, 울릉도에서는 한치를 넣는다. 나주에서는 ‘반지(밴댕이)’를 섞는 나주 전통 김치가 혀를 붙잡고, 통영에서는 새끼 우럭을 일컫는 ‘볼락’을 무에 넣어 담근 ‘뽈라구 김치’를 즐긴다. 둘 다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사철 가리지 않지만, 특히 2,3월 도다리쑥국을 먹을 때 곁들이면 맛을 더한다. 생선들은 김치독 안에서 곰삭은 젓갈의 역할을 하며 배추 맛을 깊게 만든다.
김치를 먹는 법도 지역 특색을 띤다. 지역의 특산물이 투입되고 응용되는 까닭이다. 전남 신안군 압해도 백반 식당에서는 묵은지 배추 잎마다 손바닥만 한 돼지고기를 쟁여 함께 끓여낸다. 대청도 주민들은 솥 바닥에 묵은지를 깔고 그 위에 바위섬에서 따온 홍합을 얹어 홍합김치밥을 해 먹는다. 부족한 쌀을 대신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그 현실은 잊힌 채 김치와 홍합이 섞여 만들어진 멋진 맛에 탄복하기만 한다. 동해와 남해에서는 생선회를 먹을 때 묵은지를 씻어 쌈으로 애용되기도 한다. 담백한 생선의 밍숭한 맛을 묵은지의 깊은 맛이 훌륭하게 보완해준다. 서해에서는 애호박을 무청, 배춧잎과 함께 염장한 후 끓여서 식힌 황석어젓국이나 능쟁이(칠게)젓에 버무려 호박지를 담가서는 사나흘 묵힌 후 찌개 육수로 쓴다. 사찰에서는 절인 배추에 다른 양념 없이 고추씨 포대만을 넣어 담근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추씨가 품은 매운맛이 배추에 배어들며 ‘절김치’를 완성한다.
서울 충무로의 사랑방칼국수는 겉절이 김치 맛이 일품인데 이 집에서는 하루에 두세 번씩 겉절이를 담근다. 그만큼 이 집 겉절이의 인기는 높다. 주인은 소금에 절인 배추를 재 놓고 필요할 때마다 고춧가루와 새우젓만으로 겉절이를 담근다. 냄비에 담아주는 이 집 계란 칼국수 맛도 훌륭하지만, 이 겉절이가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마늘로 매운 맛을 내는 ‘명동 칼국수’ 김치의 중독성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북 일대에서는 배추 겉절이를 담글 때 솥에서 찐 호박 살을 긁어 넣어 함께 담그기도 한다. 황석어젓이 호박 살과 어우러져 달고 고소한 맛의 합성을 이룬다.
‘감동젓무’는 서울 대갓집에서 담가 먹던 깍두기이다. 한국음식연구가 황혜성1920~2006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음력 섣달그믐 즈음에 땅에 묻어 두었던 무를 얇고 네모지게 나박김치처럼 썰어 담근다. 실파, 미나리, 갓, 표고, 밤, 배를 투입하고 작은 새우젓인 ‘곤쟁이젓’으로 간을 맞춘다.
김치를 재료로 만드는 요리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은 볶음밥 아닌가 싶다. 이 요리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메뉴이다. 기름 두른 프라이 팬에 김치 종종 썰어 넣고 햄이나 소시지, 삼겹살 따위를 투입해서 밥과 함께 볶기만 하면 되는 음식인 까닭이다. 고명으로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화룡점정을 찍는다. 식은 밥이 보이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요리이다. 필자도 썬 파로 기름 내고 마지막에 참기름 추가하는 걸 즐긴다. 계란국을 짝으로 삼으면 좋다. 최근에는 오래된 중국집들 메뉴에도 등장했다. 속이 깊은 웍에 돼지고기와 김치 넣고 센 불에서 볶다가 밥을 넣어 비빈다. 숙주, 당근, 대파 넣고 짬뽕 국물을 내놓는 게 차이이다.
김치볶음밥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김치 요리의 으뜸은 김치찌개일 것이다. 이 요리는 김치와 육수 그리고 고명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다. 방산시장 ‘은주정’을 비롯, 광나루 ‘옛집’, 돈암동 ‘찌개본점’, ‘신사동 김치찌개’ 등 유서 깊은 김치찌개 집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비법들을 갖고 있다. 이들은 공히 신 김치를 쓰고, 삼겹살이나 목살을 먼저 끓여 돼지기름을 최대한 많이 뽑아내 맛을 낸 뒤 새우젓을 첨가해 깊은 맛을 낸다. 김치찌개 노포들은 김치를 담그는 법도 독특하다. 무엇보다 물기를 빼는 게 관건. 그래야 배추에 찌개의 양념이 잘 스며들고 목살, 삼겹살, 앞다리살 등 돼지 살과의 궁합도 좋아진다. 김치는 묵은지가 깊은 맛을 내지만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들은 씻은 김치나 백김치를 사용해 담백한 맛을 추구하기도 한다. 육수는 멸치나 사골을 우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북어 껍질과 채소들로 육수를 내기도 한다. 고명은 돼지 고기나 꽁치, 고등어, 정어리 등이 주로 동원된다. 신촌 ‘고냉지’는 햄이나 소시지 같은 일명 ‘부대’를 토핑한다. ‘부대찌개’와의 랑데부인 셈이다. 경북에서는 봄이면 냉이를 우정출연시켜 봄맛을 강조한다. 계란말이는 매운 혀를 달래주는 훌륭한 파트너 역할을 한다. 서해안의 태안반도에서 고창에 이르는 해안 지역에서는 갯벌에서 서식하는 동죽조개를 넣기도 하는데 동죽이 육수를 많이 머금는 특성이 있어 색다른 김치찌개 맛을 제공한다. 경남 기장이나 거제에서는 대멸이 짝으로 등장한다. ‘꿀 조합’을 이루는 배합이 실로 다양하다.
김치는 다른 것도 변화시키고 스스로도 변신한다. 묵은지를 빨아 멸치, 된장과 함께 끓여낸 ‘된장 지짐이’는 김치의 변신 가운데 매력 있는 메뉴로 꼽힌다. 필자의 입맛을 붙드는 메뉴이기도 하다. 광주, 담양 등지에서는 묵은지가 소고기 육전이나 떡갈비와 절묘한 조합을 이룬다. 용인시 처인구 ‘종갓집식당’은 돼지비계를 투입해 육질이 부드러운 ‘묵은지 생갈비전골’을 만든다. 갈비를 찔 때 신 김치 국물을 넣어주면 화학작용이 일어나면서 예상 못 한 갈비찜 맛을 낼 수 있다. 비박 산행을 할 때 김치 외에 콩가루를 준비해 비지 맛 김치찌개를 끓이면 밥 비벼 먹기에 꿀맛이다.
김치 포기를 통째 넣어 찜으로 먹는 건 2천년 대에 처음 접했다. 일본 TV의 카메라맨을 하던 고 박성원1952~2004 씨가 점심을 먹자며 소개한 서대문 로터리 부근의 한 식당에서였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일대에서는 이름이 난 메뉴인 모양이었다. 잘 익은 김치로 만든 찌개의 변신이었다. “김치를 이렇게도 먹을 생각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며 잘라먹었다. 서울 시내 전역에 이런저런 맛집들을 꿰고 있어 여러 곳을 소개해주던 미식가 친구는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 이 김치찜이 그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서대문을 지날 때면 김치찜을 떠올리며 유쾌하고 자상하던 그의 면모를 추억한다. ‘석 달 시한부’ 선언을 받고서도 오래 전에 한 외국인과의 저녁 약속을 지키려 최선을 다하던 모습은 지금껏 깊은 감동으로 남아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북촌의 ‘김치재’는 김치찜 메뉴에 돼지갈비와 삼겹살, 고등어 등 세 종류의 배합을 선택할 수 있다. 사람들마다 취향이 달라 여러 명이 가면 육류와 해물 두 종류를 모두 맛볼 수 있어 좋다. 젊은이들은 치즈 계란말이로 매운맛을 잡는다. 마지막 코스로 투입되는 라면사리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구리의 ‘어랑추’ 식당처럼 들기름 두부구이를 김치찜에 고명으로 얹어 먹으면 색다른 맛 음미가 가능하다.
파김치로도 찜을 만들면 색다른 맛을 볼 수 있다. 집에서 가끔 해 먹는데 다른 반찬이 필요 없어 간단한 밥상 차림에 도움이 된다. 파김치찜은 멸치액젓과 새우젓, 마늘과 생강 등의 양념 맛에다 파 본연의 단맛이 역할을 해 배추김치찜과는 차이를 보인다. 파김치찜에는 자주 등갈비가 투입되는데 여기에다 방풍잎을 더하면 맛과 향이 배가된다. 방풍은 자극적인 양념 맛을 중화시키면서 독특한 자기 향을 발산하므로 ‘신의 한 수’라 부를 만하다. 1984년 전남 영광의 설도항에서 접한, 말린 조기 새끼를 묵은지에 얹어 쪄낸 ‘말린조기묵은지찜’의 깊은 맛은 지금도 기억 속에 아련하다.
한 포기의 김치에서도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오는 다양한 지혜와 함께 창의성이 빚어낸 문화의 힘을 느끼며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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