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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竹의 곧음과 蘭의 아취를 품다 - ‘오거서루’ 여섯 서예가 본문

竹의 곧음과 蘭의 아취를 품다 - ‘오거서루’ 여섯 서예가

gubo54 2022. 11. 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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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촌 김재봉(중)과 '오거서루' 멤버들

 

 

202292일 저녁 종로 수운회관 1203. ‘오거서루에 속한 일군의 장년 서예가들이 모여 작품들을 추리고 있다. 1026일에 개인전을 갖는 이촌 김재봉1961~ 씨의 작품 40점 가운데 30점을 선별하려는 것이다. 이촌은 어릴 적 필체가 뛰어났던 형들의 구박을 받다 서예에 입문한 지 2년 만인 1984년에 대한민국 예술대상을 수상한 천재이다. 가히 필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는데 좀 늦게 빛을 발했을 뿐이었다. 그는 지난 6개월 간 17세기 청대의 문장가 장조張潮가 남긴 <유몽영幽夢影> 속 글들을 화선지에 올리는 작업을 해왔다. 모두가 자연과 벗, , 책에 관한 수필과 소품들로서 도학적 분위기를 풍긴다. 모두 129점에 달했다. 예서 행서 초서 전서를 총망라했다. 오자 한 자 고쳐 쓴 것 없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두루마리 3점은 총길이가 200미터에 달한다. 그의 다재다능을 읽게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일품이야!”

 

동료들이 찬사를 보낸다. 이촌은 제자들을 가르치느라 바쁜 일과 속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시작들을 완성했다. 재주가 뛰어나면서도 성실한 면모를 보여준다. 멤버들이 모여 이런저런 품평을 하면, 귀담아 들었다가 제외시킬 작품들을 결정하려는 듯 보인다.

 

 

김재봉 유몽영幽夢影전

 

 

오거서루五車書樓선비라면 족히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룹의 리더 격인 한얼 이종선李鍾宣1953~ 씨가 한문 스승인 重山 허호구 선생에게서 받은 이름이다. 모두 6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예로 평생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다. 원래 한얼 이종선, 나현 이은설, 우현 이재무, 이촌 김재봉, 유재 임종현 등 5명으로 시작했다가 2011 우현 이재무 씨가 급작히 세상을 떠나면서 그 빈자리에 남경 김현선과 우봉 이정철이 합류했다. 공유 사무실을 마련해 30년간 함께 작업하고 있다. 이곳에서 요일별로 나누어 서예교실을 연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도 서너 개씩 서예반을 두고 있어 모두가 벼루 밭을 붓 쟁기로 갈아(연전필경硯田筆耕)’ 농사를 짓는 인사들에 다름 아니다.

 

품평회를 마치고 근처 식당으로 옮겨 뒤풀이를 가졌다. 모두가 출중한 재사들인데 오랜 시간 시기나 질투 없이 우정을 지속해온 비결이 궁금했다. 유재 임종현1964~ 씨가 답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색깔을 내려고 절차탁마합니다”. 나현 이은설1957~ 씨도 같은 말을 했다. “스스로가 문제지 다른 이들을 의식하진 않습니다”. “과연!” 필자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들에게 라이벌은 동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남다르고 싶다라는 욕구가 그들의 발전을 추동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스승 아래서 동문수학한 인연들이라 닮은꼴을 벗어나려 애를 써야 했다. 이촌의 글씨 가운데 한 자, ‘넘지 못하는 오랜 습관을 일컫는데 글자를 해체해 써서 한글 으로도 보였다. 자기만의 색깔과 해석으로 차별성을 확보하려는 이촌의 서심書心이 읽혔다. 모두가 4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만, 이촌은 특히 전서에 밝다는 평을 듣는다.

 

김재봉 전서

 

유재 임종현

                                                                      

 

유재는 한문학 전공자답게 즐겨 쓰는 글들도 유가적 사유가 깃든 것들이 많다. ‘德日新(덕이 날로 새로워진다)’, ‘明明德’(밝은 덕을 더 밝게 하라), ‘數飛’(날갯짓을 여러 번 해야 날 수 있다), ‘靜觀’(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보라), ‘進一步’(또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같은 단어들이다. 그는 사서삼경을 비롯, 시와 불경의 문장을 즐겨 옮긴다. 긴 문장만 30여 점을 선보인 2019년 전시에 이어 이듬해 척사휘염隻辭揮染전에서는 짧은 글이 나를 물들인다라는 주제에 걸맞게 공, , , , 등의 한 단어로 응축한 기운을 전달했다. 관람자들은 과 묵이 어우러져 큰 울림을 주었다”, “단어가 뿜어내는 묵직한 기운을 함께 호흡했다라는 소감들을 피력했다. 하나의 글자 앞에서 사람들은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화두로 붙잡은 채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경건한 시간을 갖는다. 자신의 내밀한 생각이 보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것은 작가에게도 큰 기쁨일 터였다. 의외였던 것은 캔버스에 안료를 이용해 글씨를 쓰면서 화선지의 먹 번짐 효과를 살려냈다는 사실이었다. 수십 년에 불과한 짧은 수명의 화선지 대신 몇백 년의 긴 수명을 보장하는 캔버스를 소재로 쓸 수 없을지를 탐색해 본 것이다. 우리 서예의 미래를 모색하려 끊임없이 사유한다는 증좌였다.

 

 

한중초서명가전

 

유재는 2022929일 서울 인사동에서 수교 30 주년을 맞은 한중 양국의 초서 명가 60인 전을 마련했다. ‘서예의 꽃격인 초서의 선을 음미해보자는 기획이었다. 필자가 초서에 예서가 가미된 도형 모양의 글자에 관심을 보이자 유재가 다가와 후한後漢 말기 초서가 예서로 바뀌던 시기에 나타난 장초章草를 서법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 장지張芝의 예술성을 오마주한 것이라며,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역시 그런 과도기의 자형字形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해냈다라고 일러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현대 중국 서단은 전통적인 서법이 중시하는 조형을 깨트리면서까지 개성 있는 자체字體를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진된 듯 흐린 채로 써 내려간 윤습潤濕 필법도 여러 점 눈에 띄었다. 농담을 대비시키고 흐린 글자를 강조하는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느껴졌다. 유재는 바깥의 글씨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서예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큰 공부가 된다라는 소감을 덧붙인다. 유재는 즐겨 가장자리에 서는 사람인 듯 보인다. 그는 거기서 중심부가 놓치는 걸 발견하곤 한다.

 

임종현 작 '덕일신德日新'

 

 

나현 이은설

 

 

나현은 서예와는 무관한 환경에서 지내다 건국대 입학 후 서예 동아리에 들면서 글쓰기와 인연을 맺었다. 이 동아리에서 동문인 소헌紹軒 정도준1948~ 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서예 인생이 시작된다. ‘과학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이지 않다라는 회의감이 짙어지면서 도피처를 찾던 시기의 선택이었다. 졸업 후에도 전공을 버리고 서예에 매진했다. ‘인문학이 인간의 삶에 더 도움을 준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소헌을 사숙한 후 서예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단 한 번도 딴 데 눈길을 둔 적이 없었다. 단지 전공을 살려 비석의 성분이 비문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보고 싶은 생각은 품고 있다. 화학도 출신인 그는 광개토대왕비의 몇 글자를 일제가 긁어내고 시멘트를 덧입혀 조작했다.”라는 주장을 화학적으로 규명해보고 싶어 한다.

인터넷에서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다 필자는 한 소장자의 작품을 보고 기억 속에서 그를 소환해냈다. 2000년 하남시청 전시실에서였다. 갓 서예에 입문했던 하남의 동서와 찾았었는데 글씨 한 점 앞에서 멈춰 섰었다. 다름 아닌 나현의 작품 무진장無盡藏이었다. 거친 듯하면서도 세심함이 함께 감지된 까닭에 마음을 빼앗겼었다. 병서된 무진장의 출전, 소동파蘇東坡,1036~1101적벽부赤壁賦문장도 시선을 빼앗은 요인이었을 것이다.

 

강 위의 맑은 바람 산 사이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말릴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고(무진장)일세

 

나현은 다른 버전의 무진장도 썼을 만큼 <적벽부> 문장을 좋아한다. “무심함이 느껴져서란다. “논밭이 묵는데 어찌 아니 돌아가리 마음이 몸의 부림 받았거니로 시작하는 <귀거래사歸去來辭>도 즐겨 쓰고 있어 그의 정신세계가 맑고 소박하며 단아함을 엿볼 수 있다. 충청도에 도연명365~427의 집 같은 모옥을 한 칸 장만해놓고 훌쩍 그곳으로 떠나곤 한다.

 

 

이은설 작 '화평和平'

 

나현이 책 한 권을 줬다. 자신의 전각 도록이었다. 한문 서예보다 3개월 정도 늦게 시작했다니 40년 세월이 배인 작품들이다. “오창석을 주로 공부했다라고 밝힌다. 그는 표현 영역의 한계에 도전해보려는 생각이 강하다.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한글 각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붓으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컴퓨터를 활용한 전각 작업을 시도하며 재미를 느끼고 있다. 만사에 무심하게 처신하고, 불투명하게 전망하면서도, 늘 내일을 꿈꾸는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 보이지만, 나현의 고독이 있어 서예의 예술성이 깊어지고 높아진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해질녁 서성이다 홀로 선 소나무를 쓰다듬는도연명의 성정性情이 읽히는 까닭이다.

 

 

한중초서명가전에 걸린 한얼의 한글 초서

 

좌장인 한얼은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서당 훈장을 하시던 조부 아래서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서예를 접하게 됐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한얼의 글씨를 반 아이들에게 본받아 쓰도록 했다는 일화는 그의 재능이 타고난 것임을 알게 한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의 한글서예교본 속 <환산별곡>을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로 임서한 기억이 있지만, 서예를 접하기 어려웠던 환경 탓에 오랜 기간 접고 지냈다. 서른 살 무렵 친구와 백화점 경영에 뛰어들어 사업가의 꿈을 펼치려다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실패해 커다란 좌절을 겪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시 서예로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사업 실패 후 두어 해를 방황하다가 한별 신두영1944~ 선생을 만나 한글서예를 시작했고, 곧이어 소헌 선생을 찾아 한문서예를 겸수兼修하면서 운명처럼 본격적인 서예 인생에 돌입했다. 한얼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들이켜듯 서예에 침참했다. 국한國漢문 서예를 두루 섭렵했다. 한문의 오체를 천착해 그를 바탕으로 한글서예에 그 필법을 전입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한국 서예계에서 국한 서예에 두루 능한 몇 안 되는 서예가로서 지금껏 한글 서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얼은 일중 선생의 서격書格을 가장 존숭한다. 한얼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가 일중으로서 그의 절제미와 순리를 따르는 풍격風格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문기門氣를 소중하게 여겨 본받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글씨에도 서격이 있다라고 말하는 한얼은 서격이 높은 글씨에 지향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대단한 호주가다. 연골軟骨 적부터 가까이 해온 술 실력은 가히 천부적이다. 별호 취월당醉月堂에서 보듯 달에 취하는 이백李白701~762의 풍류도 갖추었다. 그의 호연지기나 글씨의 맛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얼 작 구례 연곡사 삼홍루 헌액

 

한얼은 한국서학회 이사장, 한국서총 총간사 등을 지냈으며,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비, 달마사 대웅전 현판, 봉은사 보우대사 봉은탑 비문, 연곡사 당호 등을 썼고,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한글학회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20228월 방배동에서 동작산을 넘어 상도동 한얼의 자택을 찾았을 때, 실내는 온통 묵향으로 가득했다. 거실과 방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서예 작업실이었다. 거실 책상과 바닥, 평상, 방마다 글씨들이 즐비했다. “새벽 시간을 이용해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 선생의 가사歌辭 쓰고 있다고 했다. 오리 후손들의 주문에 따른 작업이었다. 성실한 그는 잠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는 듯 보인다.

 

1117일부터 서울 인사동 코트에서 가질 칠순 기념 서예전을 앞두고 한얼은 83일 남도를 찾았다. 신입 오거서루회원들에게 축문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순천의 남경南炅 김현선1959~ 씨와 여수의 우봉愚峰 이정철1967~ 씨였다. 필자도 따라나섰다.

 

 

우봉 이정철(좌) 한얼 이종선(중) 남경 김현선(우)

 

두 선생은 옛 선비처럼 건을 쓰고 삼베옷을 입고서 우리를 맞았다. 남경은 7살 때부터 구례, 보성 등지의 서당을 찾아다니며 한문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이다. 새벽 4시 반이면 공부한 보름치 문장을 암송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오전에는 사서삼경과 시 문장 수업 듣고 운을 받아 품고선 하루 종일 소죽 쑤고 농사일 거들다 저녁에는 글을 지어 제출했다. 서예는 틈틈이 혼자 연습했다. 우봉 역시 12살에 남경을 좇아 순천의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했고 서예는 혼자 쓰곤 했다. 20년을 공부한 끝에 비로소 물리物理가 생겨하산했다. 문장의 뜻뿐만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까지 파악할 수 있어야 물리를 터득했다.라고 할 수 있다.

 

 

남경 작 '천부'

 

세 선비들이 모두 삼베옷을 걸친 채 묵향 가득한 서실에서 담소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셋은 가끔 서울이나 순천에서 회동해 친목을 다진다. 이 날은 우봉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 자리를 가졌다. 우봉이 미리 여수시장에서 삼치와 붕장어를 사다 회를 준비해놓았다. 우봉의 작품들이 자아내는 서림書林의 아취가 농주의 맛을 더해주었다. 11월 전시회 제목을 칠순의 의미를 담아 이제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칠십이이七十而已로 하고 싶어 하는 한얼의 희망에 남경이 이이而已는 다른 글자를 보조하는 어조사여서 제목으로 적절치 않다라고 반론을 제기하면서 술자리가 일순 토론장으로 변했다. ‘그만이라는 뜻의 而已는 당의 시인 퇴지退之 한유768~824의 시 가운데 허물어진 집 세 칸이면 그만破屋三間而已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정도면 괜찮다라는 뜻으로 쓴다. 조선조 후기 송석원 시사松石園 詩社의 멤버 장혼1759~1828이 당호로 쓰면서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한문에 조예가 깊은 선비들끼리 갑론을박하는 모습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저랬으려니, 하는 느낌을 주었다.

 

 

소헌 정도준

 

오거서루 여섯 멤버들은 모두 소헌 서실에서 수학한 동문 출신들이다. 소헌은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합천 해인사 해인총림海印叢林의 현판을 쓴 유당惟堂 정현복1905~1973 선생의 자제로서 필획이 힘차고, 여백과 선이 조성하는 회화 미를 멋들어지게 구현한다.는 평을 듣는다.

 

 

우봉 이정철 글씨

 

여수의 저녁 자리에서 동근이지同根異枝의 제자들에게 옛 시절을 물었다. 다들 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두가 어느 정도 글씨를 써온 상태여서 스승은 어떻게 하라는 주문보다 하지 말아야 할 속습俗習들을 지적해주셨어요, 혼자 써오면서 손에 밴 제자들의 나쁜 습관들을 털어내고 군더더기가 없도록 다듬어주셨다는 얘기였다. 속기俗氣를 없애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취지에서였을 뿐, 각자의 서예 개성은 참견하지 않았다. 선이나 자형字形, 장법章法, 필법筆法, 묵법墨法 등의 형식을 배웠으려니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당연히 한 스승에게서 배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스승은 제자들이 자기만의 심상心象으로 문장을 쓸 수 있도록 바탕을 닦아준 것이었다. 그들의 글씨에서 굳건한 골에 탄탄한 근이 보이는 배경이었다. 오거서루 여섯 멤버들은 모두 한국 서예 청년 작가전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술의 전당이 건립 초기에 20~40 세 사이의 젊은이 가운데 4가지 체를 모두 구사하는 작가를 선별해서 가졌던 초대전 성격이어서 지명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명예로운 일이었다.

 

글씨에는 그 사람의 성정性情이 그대로 반영이 돼요한얼의 말처럼, 어려서부터 유학에 천착하며 물리를 깨친 그들의 생김이 글자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서예는 문사철文史哲의 결정結晶임에 분명하다. ‘마음에 늘 간직한다라는 뜻을 담은 남경의 당호堂號 복응당服膺堂이 그들이 서예에 임하는 정신을 담은 게 아닐까, 여겨졌다. 이날 자리는 남경의 유장한 유산가한 자락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남경 김현선의 당호 '복응당服膺堂'

 

곁에서 지켜본 오거서루의 면면에서는 자유로운 은군자隱君子이고자 했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삶이 비쳤다. 무작위, 고요, 탈속, 무 흔적의 삶을 추구한 게 노장老莊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2005년 벽두 서예계를 놀라게 한 <삼문전三門展>의 주인공들이었던 사실도 노장 사상에 비추어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학정 이돈흥과 하석 박원규의 문하생들과 더불어 세 문중이 합동전시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문중끼리 갖던 그들만의 축제풍토를 깨트린 이 사건을 두고 서단은 우리 서예계에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오거서루서여기인書如其人을 따른다. ‘서예가 그 사람됨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글자의 뜻을 품고 쓰는 이의 교감도 담아내야 표현에 생명이 깃드는 까닭이다. 한얼이 덧붙인다.

 

호연지기浩然之氣도 필요하고, 일반의 가치관과 거리를 둘 수도 있어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어요

 

서예에 임하는 자세도 순리를 좇아야 한다, 여긴다. ‘능한글씨를 경계하려는 이유이다.

 

글씨는 능하게 쓰는 것보다 순하게 쓰는 게 어려워요. 오래 쓰다보면 능해지지만, 그게 좋은 글씨는 아니예요. 힘을 빼고 순하게 쓰는 글씨가 좋은 글씨죠

 

오거서루는 서예의 세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서울 인사동 수운회관 '오거서루'

 

2022924일 서울 인사동에서 소헌 문중의 근묵槿墨서학회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31년 째인 올해는 뛰어난 선묵禪墨을 남긴 경허1846~1912 선사의 글씨에 대한 풀이가 있었다. 글씨 한 자가 어떤 영향 하에서 생겨났는지, 어떻게 자형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안정감을 도모했는지, 동적인 흐름을 어떻게 살렸는지, 조형미를 어떻게 이루었는지 등의 연구가 발표됐다. 서체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구와 공부 끝에 비로소 하나의 모양으로 자리 잡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글씨가 사후에도 평가 대상이 되는 걸 지켜보며 서예가들이 한 자 한 자에 온 마음을 다 쏟을 수밖에 없겠구나, 알게 된다.

뒤풀이 자리에서 소헌 선생이 당신의 스승이셨던 일중의 일화들을 쏟아냈다. 긴말과 빈말, 비방, 시기를 금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 등에 관한 가르침이 담긴 것들이었다. 소헌도 제자들에게 그런 예법을 주문했을 터이다. ‘오거서루가 그토록 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거서루는 한글 서예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스승이었던 일중과 소헌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비 서체를 활용해 1443년에 반포한 한글 해례본 이후 오랜 세월을 소홀히 해 온 탓에 현대적 감각의 서체와 글자 간 조형미 등 개발할 여지가 여전히 많은 분야이다. 가운데 자처럼 글자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자형이 없어서 한글은 조형미를 추구하기가 어렵다라는 중국 서예가들의 생각을 뒤엎을 창의적인 개발도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문자학에 밝은 연화사 구선 스님은 한글의 자음은 사람의 다양한 본성을 표방하고, 모음은 그 성정이 여러 방향으로 전달되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어서 결코 소리문자로만 볼 수 없다.”라는 생각을 펼친다. “‘은 밝음, ‘은 생명, ‘은 순환, ‘은 적정寂靜 등이고, 모음은 상하좌우 등의 방향과 운동성을 내포한다.”라는 것이다. “글자가 뜻도 품고 있다.”라는 인식이다. 이런 이해도 그에 걸맞은 글씨체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오거서루셋만 모이면 다툰다.”는 속설을 깨고 30년간 형제의 우의를 지키며, 아름다운 길벗으로서 한국서단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공히 국전 심사위원과 초대작가를 거치고 어느새 서단의 맏형 세대가 된 오거서루를 향해 더 큰 역할을 맡아해 달라라는 후배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글씨로만 말해야 한다며 뒷짐 지고 있지 말고, 후배들의 작품에 코멘트를 하고 가르침을 달라라는 직접적인 주문도 나온다. 20세기 이후 소전 손재형1903~81을 비롯해 석봉 고봉주, 유당 정현복, 검여 유희강, 강암 송성용, 철농 이기우,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온 한국 서단의 맥이 끊어지지 않기를 갈망하는 외침으로 여겨진다. 바로 위 세대인 초정 권창륜, 하석 박원규, 초민 박용설, 학정 이돈흥, 소헌 정도준 등도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쏟은 분들이다. 후배 세대들은 계속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 게다. 서예를 전업으로 삼는 신진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어 이들의 우려가 가볍지 않게 들린다. “서예가 스스로를 수양하고 항심을 유지하게 하는 순기능을 갖고 있어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현대인의 심성을 계발해줄 예술이라는 인식을 널리 확산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할 터이다. ‘오거서루의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