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쉽게 쓰고 단순하게 부른다 싱어송라이터 강명중 씨 본문
2021년 3월 6일 영동고속도로 횡성으로 들어서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간밤에도 눈이 내려 산들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나무들은 예외 없이 설화를 꽃피우고 있다. 이름답다는 생각도 잠시 영동 산간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 뉴스를 듣는다. 며칠 전 폭설로 이 도로가 눈으로 덮이면서 차들이 밤새도록 서 있어야 했다는 뉴스가 떠오르며 불안한 마음이 살짝 엄습했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미 목적지 대관령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맑은 날 부드러운 훈풍이 얼굴을 간지러는 날도 있고 눈 내리고 바람 불고 비 맞는 날도 있게 마련이다. 지난 해에 우연히 들렀던 한 라이브 카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입구의 눈밭을 걸어 카페에 들어섰을 때 주인 강명중(1965~) 씨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백 평 남짓한 넓은 홀 안에는 4명의 손님들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을 뿐 한산했다. 창밖으로는 눈발이 사선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뉴에이지 풍의 조용한 음악이 실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고요한 평화로움이 지배하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를 깨는 유일한 존재는 2 살배기 대형 푸들 ‘윌슨’이었다. 창밖으로 손님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입구 쪽으로 뛰어가 몸을 세우고선 밖을 주시한다. 2,3 초 후면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윌슨’의 격한 환영을 받아야 한다. 40대와 20대로 보이는 모녀는 익숙한 듯 ‘윌슨’의 애정공세를 즐긴다. ‘윌슨’은 낳자마자 분양받은 아이인데 지금은 이 곳의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리해서 사람들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
강명중 씨가 대추차를 내려 들고 왔다. 강 씨는 두 군데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러 명의 직원들을 두고 있다가 코로나 여파로 대관령 쪽 카페는 조카와 누나 모자에게 일임하고, 이곳 횡계의 카페는 혼자서 지키고 있다. 커피 내리고 차 만들고 술 서빙하고 계산받고 노래하고 음악 반주하는 일까지 맡아 한다. 크지 않은 체구지만 단단한 인상이다. 굵은 뿔 테 안경 너머 눈은 늘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오랜 관찰로 미루어 볼 때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의 인상이다.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간단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카페 이름이 ‘노기’인데 무슨 뜻인가요?” 묻자, 가수 전영록 씨와의 인연을 이야기 한다. 젊은 시절 음악 현장에서 전영록 씨를 만나 ‘형 동생’ 하며 지내온 세월이 오래다 보니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했다는 것. 고향인 이곳에 건물을 지은 친구로부터 “한 번 살려보라.”는 권유를 받자 생각 끝에 전영록 기념관을 만들었다. 카페 ‘노기’는 ‘록이’의 발음 표현으로 실내 공사를 직접 맡아했을 정도로 애정을 쏟은 강 씨의 창작이 가미된 공간이다. 전영록 씨는 자기 물건들을 둘 데가 없던 차여서 위층에 기념관을 꾸리는 데는 애로가 없었다. 정작 사람들은 그 공간에는 관심이 없고 아래층에 마련된 무대에 전 씨가 서는지만 궁금해한다. 강 씨는 ‘윌슨’과 4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머문다. 아내와 딸은 서울에 있다.
“벌이는 어느 정도나 되나요?”라는 물음에 그가 헛웃음을 짓는다. 코로나 상황에서 물으나마나 한 질문을 한다는 뜻이었을 게다. “그렇긴 해도 잘 견디고 있다”라고 답한다. 이곳 알펜시아 지역이 돈 있는 서울 사람들의 별장 지역이어서 이 지역 유일한 라이브 업소를 즐겨 찾아준다는 것이다. 강 씨의 연주가 그만큼 매력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어떤 손님들은 봉투에 팁을 두둑이 담아 두고 가기도 한다. 백만 원을 희사한 열성 팬도 있었다.
그는 강릉으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밴드를 결성해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해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싱어송라이터인 그의 능력은 가수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계은숙 씨에게 <아파요>, 우순실 씨에게 <폼나게 섹시하게> 등을 써주기도 했다. 최백호, 전영록 씨 등은 자기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기 때문에 주고 싶어도 닿지 않는다. 친한 누나인 탤런트 김청 씨가 출연하는 TV 오락 프로그램에는 그녀의 부탁으로 하루 만에 삽입곡을 써주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같이 삽시다’라는 타이틀의 곡이었다. ‘한 끼 밥상 같은 삶에 반찬 같은 추억을 가득 채웁시다’라는 노랫말을 담았다. 프로그램의 취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는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쓱쓱 가사를 쓰고 곡을 짓는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여겨진다. 강 씨가 몇 개의 곡들을 들려주었다. 재즈 소울 블루스 락 발라드 트롯 펑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를 아우른다. 대관령 카페에서 누나와 함께 사는 노모를 위해 지은 곡도 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늘 말씀하시곤 했다. “너도 나훈아처럼 따라 부르기 쉽고 돈 되는 곡 부르면 안 되냐?” 그러시며 하루는 어머니가 당신께서 직접 지은 노랫말을 흥얼거리셨다. 아들은 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가사를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 노랫말을 다듬어 곡을 붙였다.
이렇게 탄생한 ‘80이 넘어도 여자랍니다’라는 곡은 이런 가사를 담고 있다.
대관령 굽이 굽이 흰눈이 내리면
바람 언덕 찻집에서 정을 나누던
그 옛날이 어제 같구나
대관령 굽이굽이도 열차가 지나가는데
내님 실은 종착역은 어디인가요
차표 한 장 구해주세요
무심타 생각하면 밉기도 하지만
그래도 날 사랑한 사람
비워진 찻잔에 그리움 채워도 애가 타 눈물이 나
80이 넘어도 여자랍니다
어머니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하셨고 아들은 뿌듯해했다.
소년 명중은 경남의 바닷가 진교에서 태어나 자라다 선친이 국수 공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옮겨 살았다. 한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유하게 지냈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나면서 느닷없이 이곳 횡계 산골로 쫓기듯 이사 왔다. 1975년 무렵 횡계는 ‘깡촌’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새카만 몰골이었다. 그는 이곳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강명중 씨는 10대 시절부터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태웠다. 공부는 젖혀두고 밴드 활동만 하느라 학교를 안 가기도 했다. 요행히 담임 선생님의 끈질긴 훈화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앞으로 뭘 하든지 간에 남들 하는 건 다 마쳐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그런 다음에 음악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출석만 해라 책임지고 졸업은 시켜줄 테니.” 설득당한 강 씨는 학교를 떠나지 않은 덕에 무사히 고교를 졸업했다. 그 선생님의 지도로 수능시험을 통과해 전문대에 들어갔다가 욕심이 생겨 다시 재수를 거쳐 4년제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님들께는 알리지 않은 채 독단으로 결행한 사고였으나 ‘법학과’에 들어갔다는 말에 별일 없이 넘어갔다. 사고는 또 기다리고 있었다. 1학년 때 덩치 큰 체육과 선배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던 친구를 구하느라 격렬한 폭력을 가한 대형사고를 치면서 강 씨의 부모는 피해자를 찾아가 무릎 꿇고 빌어야 했다. 읍소를 거듭한 끝에 겨우 합의를 보았다. 전재산이던 소 세 마리를 팔아 천팔백만 원을 건넨 덕에 강 씨는 ‘빨간딱지’를 피했다. 85년도로서는 큰돈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30대에는 도박에 빠지면서 이혼의 아픔도 겪었다.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맞았을 때마다 늘 부모님께 죄송했다. 부모님은 늘 이 말썽 많은 아들 걱정을 하셨다. 쉰 나이에는 위암에 걸려 또 한 번 걱정을 끼쳐드려야 했다. 당시에는 아버지도 위암 말기 상태여서 어머니는 두 배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노모에게 노래 한 곡 헌정한 것으로 효도를 다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늘 이 노래를 입에 달고 지내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흐뭇해지곤 한다.
필자가 강명중 씨에게서 받는 인상은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군 제대 후에 시도한 ‘민중 음악’ 활동 등 음악적 시도도 트렌드를 잘 읽은 것이었고, 부친을 닮아 사업 머리가 좋아서 이런저런 구상을 많이 펼쳤다. 음반 제작을 비롯해 생활정보지, 회원카드, 아바타 게임 등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이력을 갖고 있다. 남의 아래서 일하는 게 성격에 맞지 않아 자기 사업을 했다. 사업을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그의 주위에는 늘 돈이 따랐다. 사업에 차질이 생겨 덕소의 카페에서 일하던 서른 살 무렵에는 주인의 요청으로 연주 외에 조리와 운영까지 맡아 월급을 3백만 원이나 받았다. 대기업에 다니던 세 살 아래 동생이 70만 원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어서 미사리로 건너와 당시 막 들어서던 카페들에서 같은 조건으로 일하며 월급을 받았다. 돈이 생기면서 한눈을 팔다 돈을 모두 잃어버리는 시련기를 맞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 불러온 결과였다. 암이 발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위 절반과 임파절을 모두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큰 시련에서 벗어난 후 그는 전환기를 맞는다. 한동안 딴짓하느라 잊고 지내던 음악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의 삶에 있어 의미가 큰 순간이었다. 그의 삶이 음악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계시이기도 했다. 그렇게 강 씨는 다시 음악의 길로 접어들어 지금까지 음악과 함께 살고 있다. 미사리에서 직접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면서는 전영록, 조항조(1954~) 씨를 포함한 여러 선배 가수들과 인연도 맺었다.
그의 음악 세계는 개성이 있다. 노랫말도 쉽게 쓴다. 시는 너무 압축적이어서 듣는 이의 가슴에 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냥 사는 이야기를 쉽게 풀어낸다. 7년 전에 일찍 세상 떠난 친구를 추억하며 만든 곡이 대표적이다.
‘창밖에 비가 내리네 소리 없이 하루 종일 내려
유리창에 서린 도화지 속에 너의 얼굴 그려본다’
쉬운 노랫말을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았다. 멜로디도 조용한 걸 선호한다. 시끄럽지 않고, 들으면 잠이 오는, 곡을 쓴다. 암 판정 후에 주변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음악 스타일에도 변화를 준 연유였다. 그가 핸드폰에서 몇 개를 찾아 들려주었다. 안개 낀 바닷가, 비 내리는 창밖, 바람 부는 대관령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음악의 인상주의’랄까.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풍경이 절로 그려진다.
많은 곡을 지었지만 음원은 하나밖에 내지 않았다. “대중과 타협하기 싫었다”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 이문세의 매니저가 몇 번을 찾아왔어도 사양했다. 기획사에 들어가 개성을 잃은 채 그 회사의 상품이 되어버리는 게 싫었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 들어있는 음악을 다 소화하려면 자기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했다. 유행 타는 대중음악보다 한 사람이라도 좋아해 줄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은 일념이었다. 옷을 내 식대로 다양하게 만들어 입고 싶은 욕구와 일맥상통하는 생각이었다. 복잡하게 테크닉을 개입시키는 걸 싫어한다. 노랫말 전달하려고 굳이 고음을 질러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노랫말을 쉽게 하고 멜로디를 단순화시키고 악기수를 줄였다. 피아노 반주 하나로 끌고 가는 식이다. 몰입도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걷어내는 작업을 거듭한 결과 그는 지금 ‘미니멀리즘minimalism’ 음악에 도달했다. 간소화한 음악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음악에 마니아층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어쩌다 한번씩 이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가지면 50명 공간에 80여 명씩 마니아 팬들이 몰려온다. 팬들은 그의 연주를 촬영해 유튜브에 올리는 정성을 보인다.
그가 작사 작곡한 <내 사랑아>라는 곡은 아직 비공개작인데 곧 조항조 씨의 노래로 우리 귀에 와 닿을 예정이다.
사랑아 따뜻한 사랑아 어둠 밝혀주는
태양보다 더욱 밝고 따뜻한 사랑 내 사랑아
보이는 게 다 아니야 눈에 비친 모습이 지쳐 힘들어 보여도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아 나와 함께 있으니
사랑이란 마법 같아 다시 내게 희망을 주는 커다란 힘이 있어
아낌없이 모두 사랑하자 삶이 끝날 때까지(후략)
노랫말은 강명중 씨의 삶이 응축된 듯한 인상을 준다. 그 자신도 “어떻게 이런 노랫말을 썼는지 모르겠다”라며 웃는다. 자기 삶을 풀어낸 이야기이니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인식들이 불현 듯 의식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까닭일 게다.
2절의 가사처럼 ‘우리 영원히 함께 하자며 내 손 잡아주던 하늘보다 더욱 넓고 따뜻한 사랑’을 그는 깊이 이해하며 널리 구현하고 싶어 한다. 그 대상은 가깝게는 이제 스무살이 된 딸일 수도, 아내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친구들일 수도 있다.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팬들일 수도 있다.
대관령을 넘어 돌아오는 날, 강명중 씨의 어머니가 노랫말을 지은 노래가락이 떠올랐다.
‘대관령 굽이굽이도 열차가 지나가는데 내님 실은 종착역은 어디인가요’
너나할 것 없이 종착역을 향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어떤 모습으로 닿을 것인가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일 뿐이다.
‘무심타 생각하면 밉기도 하지만 아낌없이 사랑하자 삶이 끝날 때까지’
흥얼거리다 보니 두 노래의 가사를 합친 게 돼버렸지만 그럴 듯 했다. 노래가 만물의 내면에 울트라 바이올렛Ultra Violet 파장을 미치는 걸까? 미운 감정도 사랑으로 바꿔버릴 정도로 초월적인 파장. 지난 밤 강명중 씨의 반주로 ‘홀로 아리랑’을 불러 격찬을 받은 친구는 밤새 잠을 설치더니 단잠에 빠져 있다. 설화가 곱게 핀 하얀 나무들을 차창 밖으로 완상하며 봄기운이 완연하다는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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