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매점 삽화가 - 한창기 씨 본문

한창기 작
영종도 방조제는 인천공항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갑문은 공항 유수지의 수량을 조절한다. 2013년 을왕리 해수욕장을 갔다 나오는 길에 이 방조제 길로 들어섰다가 매점이 눈에 들어와 커피를 한잔 마신 적이 있다. 한갓진 곳인 데다 ‘세월’이라는 매점 간판이 마음을 두드린 까닭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월이 좀먹나? 쉬었다 가는 것이 인생 아니냐, 그러니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라는 주인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었다. 글렌 캠벨(Glen Campbell, 1936~2017)의 1969년 발표곡 <Time>의 노랫말처럼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게 펼쳐진다. 달려가기도 하고 기어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지겨워진 관계처럼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흘러가고, 누군가에게는 귀중품을 훔쳐가는 도둑처럼 날쌔고 매몰차서, 그 속도와 무게의 감각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일부는 시간 속 매듭을 잘 붙들어 재도약의 계기를 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놓치고 만다. 그러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때 찾아왔던 찬스의 의미를 파악하고선 함부로 대한 걸 크게 후회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씩은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 우를 범한 경험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잠시 내려놓고 쉬면서 현재의 시간을 반추하거나 지나온 과정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건 지혜로운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매점 세월은 그런 쉼의 공간이라 여겨졌다.

이 집은 주로 방조제를 찾는 낚시꾼들이 찾는다. 낚시 도구와 미끼 따위를 구입하거나 낚시 포인트에 관한 정보를 듣거나 배를 채우기 위해서이다. 밀물 때는 낚싯대와 투망 등을 동원해 숭어를 잡고, 물이 빠지면 개펄에서 낙지나 박하지(돌게), 소라, 굴 등을 채취한다. 출출하면 이 매점에서 컵라면이나 어묵탕으로 배를 채운다. 지나가던 드라이브 객들은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이 집의 특색은 가게 내부와 외부에 걸쳐 전시돼 있는 삽화이다. 만화 같은 한 컷 짜리 그림에 교훈적인 말 한 마디가 함께 한다. 삽화와 글들은 철학적이고 유머러스해서 보는 이를 웃게 만든다. “재미나다”는 필자의 칭찬에 가게 아주머니는 “남편의 솜씨”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직장에 나가는 남편은 쉬는 날 가게에 나와 일을 도와준다.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는 얘기에 “벌이가 괜찮으냐?”라고 물었더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7년의 세월이 흐른 2020년 가을, 코로나로 세상이 움츠러들던 때에 친구와 이곳을 찾았다. 전철과 버스를 바꿔 타며 두 시간 남짓 걸려 닿았다. 오랜 장마 기간이 끝나고 하늘색이 더할 나위 없이 파래지자 영종도 나들이를 하고 싶었고, 나온 김에 문득 이 집이 아직 있나 궁금해졌던 것이다. 세월 낚시 매점은 다행히 그 모양 그대로 거기 있었다. 이럴 때 필자는 반가움을 느낀다. 그리워하던 대상이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의 고마움이다. 이 집이 필자의 마음속에 좋은 인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일 게다. 방조제 갑문 아래서는 중년의 사내가 투망을 하고 있다. 숭어를 노리는 모양이다. 매점 뒤편 언덕 안 철책 출입문 앞에는 낚싯대를 정비하는 낚시꾼들이 눈에 띈다.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진을 친 채 생선의 입질을 포착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푸른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뒷모습은 경건해 보일 정도이다. 철책문으로 들어가 방파제를 돌아다니며 곁눈질 해보니 모두들 잡은 게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고기보다 세월을 낚고 있다. 몇몇은 낚시는 뒷전인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술판을 벌인다. 컵라면에 새우를 넣어 먹는 사람들도 있다. 즉석 해물탕면인 셈이다. 좋은 아이디어로 보인다. 세월 매점으로 돌아오니 공항공사 외곽 보안요원으로 근무한다는 남편이 보였다. 평일인데 어떻게 있는지 물었더니 “얼마 전에 퇴직했다”라고 말한다. 오는 길에 공항 활주로에 늘어서 있던 대한항공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마음 아팠던 생각이 겹쳐진다. 코로나 여파는 목하 우리 사회를 맹타 중이다. 필자는 이렇게 삽화의 주인공 한창기(1964~) 씨와 조우했다.

친구와 필자는 수십 장에 이르는 삽화들을 모두 감상한 후 바깥 테이블에 앉아 컵 라면에 소주를 한잔했다. 아내는 주문을 받아 음식을 조리하고 남편은 물건을 들어 나르며 아내를 돕고 있었다. 삶이라는 부담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쉬고 있는 한 씨에게 이것저것 묻게 되었다. 삽화에 관한 궁금증이었다. 그러다 이곳의 간판 메뉴인 해물김치전과 어묵탕을 안주로 주객이 뭉쳐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한 씨는 술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심하게 된다고 말한다. 좌판 앞에 내걸린 ‘술만큼 정직한 게 없다’라는 그림 속에는 숙취로 고생하는 사내가 변기에 토하고 있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작가 스스로의 숙취 경험을 표현한 것이려니 여겨본다. 10년 연상인 우리도 익히 아는 내용이어서 공감을 표했지만, 오가는 얘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결국 4병을 마시고 만다. 모두가 젊었더라면 족히 4병은 더 시켰을 게 틀림없어 보였다.

한 씨는 조심조심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충남 당진 출신인 한 씨는 2본 동시 상영을 하던 서울 용산 극장에서 간판 그림을 그린 이력을 갖고 있었다. 고교 시절 용산에 살던 이종사촌 누나 집에 들렀다가 극장 간판을 보고는 빨려 들어갔다. 앞뒤 재지 않고 그 길로 용산 극장 간판장이던 김영배 씨 휘하로 들어가 도제수업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가 한 씨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었다. 신나게 수업을 받던 한 씨는 가출한 아들을 찾아온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낙향하면서 그 인연과 결별해야 했다. 만약 계속했더라면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 10개월이 그의 일생에서 그림 수업을 받은 유일한 기간으로 남았다. 그림과 함께 글씨도 나름의 체를 잡았다. 군 제대 후에는 충무로에서 색 보정사 일을 했다. 칼라 사진의 색 보정과 복사 등을 맡아하는 일이었다. 요즈음의 ‘포토샵’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한지 초상화도 그의 손을 거쳐 여러 장으로 복사됐다. 8년 정도 이 일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에는 용역직 보안요원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비정규직이다 보니 살림살이를 돕고자 아내가 2004년부터 매점을 내 운영하고 있다. 한 씨가 일하는 인천공항의 뒤편인 데다 친척들이 가까운 을왕리에 살고 있던 연유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쉬는 날에는 가게 일을 도우며 틈틈이 삽화를 그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보고 힘을 얻었다. 손님들의 얼굴도 그려주었다. 그의 삽화는 해학적이다. 충청도 출신이어서 타고난 듯 보였다. 충청도 사람들은 관조의 힘이 대단해서 삼라만상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내는 재능을 갖고 있다. 삼국시대 때부터 조심하며 살아야 했던 까닭에 세상과 마찰음을 내지 않도록 간접화법으로 온유하게 처신하는 훈련을 하다 보니 충청도 사람들의 핏속에는 해학적 성향이 DNA로 굳어져 왔다. 신중한 면모를 보이긴 하지만, 한 씨는 여느 충청도 사람들처럼 속내를 숨기는 의뭉은 떨지 않았다.

‘행복이 별거냐’라며 다리를 꼰 채 드러누워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라며 입이 찢어지는 사내의 그림도 미소 짓게 만든다. ‘올해 장사 날로 먹게 해 주세요’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사랑은 표현이 중요하다’라는 그림 속에는 이불 속 아내의 발차기에 ‘턱 쭈가리’를 얻어맞아 이빨이 나가는 게으른(?) 사내가 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모두 남편”이라고 아내가 웃으며 귀띔한다. 생활이 고스란히 삽화에 배어있음을 알게 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들도 있다. ‘가는 술이 고와야 오는 술도 곱다네’, ‘마음은 반성으로 닦아져야 깨끗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마라’, ‘흉터가 있다는 것은 상처를 이겨냈다는 것이다’ 등이다. ‘사랑은 끓이고 마음은 식혀라’,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는 삽화는 농염한 부부의 정을 표현한다. 19금에 해당하는 남녀관계를 묘사한 그림도 부부가 모델이다. 두 사람은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부인이 한 살 연상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든든한 원군이다. 특히 아내는 남편의 그림에 미련이 많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가 좋아하는 재능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간구한다. 남편이 매일 그림일기를 그리는 모습을 수십 년 동안 지켜봐 온 까닭이다. 가족과의 일상, 술자리 모습, 가게 풍경, 직장생활, 계절과 자연 등이 주요 소재이다. 가게에 내걸린 삽화들은 그 일기들 가운데서 발췌한 것들이다. 우리가 글귀들에 감탄하자 자기가 지은 것도 있고, 다른 이의 문장 속에서 빌려온 것들도 있다고 말한다. 그림이 먼저 글귀를 떠올리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글귀를 그림 화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만화계의 은둔 고수’라고 칭하기도 한다. 삽화 한 컷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니 프로 만화가에 필적할 만하다 싶다. 남들은 그렇게 평가하지만, 정작 한 씨 자신은 TV 프로그램 <백반 기행>에 비치는 만화가 허영만 씨의 내공에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닮고 싶어 한다. 고 신동우 화백의 화풍과 속작速作을 좋아하는 데 자신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이곳에 들렀던 사람들이 한 씨의 삽화들을 재미있어하면서 이 집은 입소문을 탔다. 방송국에서 찾아왔다. SBS의 “세상에 이런 일이”와 OBS의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방송의 힘을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출판사에서도 찾아와 책을 내자고 제의해 응했다. 그의 첫 저서는 ‘행복이 별거냐’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나 아내의 자랑거리로는 남았다.
필자와 친구는 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활동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코멘트 글을 덧붙이는 전 과정을 촬영해 방송을 하면 반응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망설이다 거듭되는 우리의 권유에 그리 해보겠다고 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운이 닿으면 의외의 소득을 얻게 될 수도 있다. 한 씨가 그 일을 하게 된다면, 그가 그동안 쏘아댄 활시위들이 빗나가기만 한 게 아니라 모두가 과녁을 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터이다. 사람의 운명에는 달아나려 해도 피해 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운명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한 좌표 위에 자리를 잡는 까닭이다. 우리는 조만간 그림과의 운명적 연緣으로 유명 삽화 유튜버로 변신한 한 씨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 씨의 16년 시간이 묻힌 세월 매점은 오래지 않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땅 주인인 공항공사가 이 일대 스무 개 가게들에게 철거 통첩을 내린 까닭이다. 연내에는 문을 닫아야 한다. 필자에게는 영종도의 명물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러면 지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꽃들처럼 세월 매점의 존재 역시 부재함으로써 비로소 드러날 터이다. 10월 하순 친구들과 다시 이곳을 찾아 앞당겨 송별연을 가졌다. 부인의 해물 김치전과 어묵탕이면 충분하지만, 정이 많은 한씨는 “닭을 잡아 엄나무 백숙을 끓여놓겠다”라는 친절을 실천에 옮기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 일행은 술잔을 나누며 영종도 방조제의 ‘세월 매점’을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렀다. 새로운 인생길에 나설 한창기 씨의 앞날도 축복했다. 한 씨는 고향 당진의 낚시터와 집 근처 계양산 자락 등을 후보지로 삼아 매점이나 ‘가맥점’을 낼 계획을 하고 있다. ‘가맥점’은 구멍가게와 주점을 겸하는 영업 형태인데 부인의 해물김치전 솜씨로 미루어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어디서 가게를 열든 재능이 꽃을 피워 많은 단골을 확보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권한 유튜브 활동을 병행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남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돋보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아는 까닭이다.
때로 대상은 눈에서 멀어진 후 마음속에 더 단단히 둥지를 틀기도 하는데 필자에게는 세월 매점이 그럴 것 같다. 너댓 번밖에 안 가본 곳이긴 해도 그곳은 오래도록 필자의 뇌리에 하나의 이마쥬Image로 자리 잡을 것이다. 영종도 북쪽 해안 기다란 방조제 서쪽 끝 갑문 옆에 김치전이 맛있던 매점 ‘세월’이 있었고, 그곳에서 주인 한창기 씨가 해학 넘치는 삽화를 그리던 풍경이 견고한 심상心象으로 맺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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