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채나눔’의 건축가 고故 이일훈 본문
2021년 7월 2일 ‘나누며 살기’와 ‘불편하게 살기’를 건축의 모토로 삼아온 건축가 이일훈1954~2021이 세상을 떴다. 그를 아는 많은 지인들이 못내 아쉬워했다. 아직도 좀 더 살아 ‘이일훈 표’ 집을 더 많이 지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는 나뉜 지형 속에서 나눔을 통해 조화를 이루려 했고, 편한 삶을 지양해야 환경오염과 기후위기,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왔다. 그의 이런 철학은 ‘채나눔’이라는 표현으로 탄생했다. 모든 공간을 크게 내부화해 한 덩어리로 만들 게 아니라 옛날처럼 안채, 바깥채, 사랑채 등 작은 단위로 나눠 외부공간을 넓히자는 시선이다. 오가느라 움직이며 여유도 가지고 소통하게 만들자는 생각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동선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주택을 개조하면서 전통 가옥이 주던 미덕을 상실했다. 이일훈의 건축은 그것을 되살리려 했다. 경기도 퇴촌의 ‘탄현재’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별채로 가야 한다. 건너가느라 비나 눈을 맞을 때도 있다. 25평에 불과한 집이지만, 작은 공간이더라도 쪼개서 안팎을 잇는 동선을 만드는 게 그의 건축 스타일이다. 건축의 지형을 바꾸면 삶의 지형도 바뀐다는 생각에서이다. 그의 건축을 볼 때마다 “집은 사람이 짓지만, 집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필자는 1998년 기자 시절 공 건축을 취재하다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인천 만석동 달동네에 지은 그의 작품이 눈길을 끌어서였다. 저 예산으로 만든 지상 3층, 연면적 45평의 ‘기찻길 옆 공부방’이었는데, 경인선 철로 근처에서 사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부모들이 맞벌이로 생계를 잇느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놀고 공부하고 뛰놀도록 하려는 배려가 담긴 곳이었다. 학습실과 옥상 마당, 쌈지마당이 갖추어진 오밀조밀한 구성은 단박에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공동체 문화의 회복이 거기 있었다.
이일훈을 처음 본 인상은 ‘세상과 더불어 살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필자는 1984년 무렵 가수 김민기 씨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어 이일훈의 사람됨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김민기 씨는 인맥을 동원해 농촌의 쌀을 서울에 직접 판매함으로써 중간 유통비용을 줄여 농민의 소득을 늘려주려는 캠페인을 폈었다. 이일훈은 1990년대 소장 건축가들이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공공성 모색을 위해 결성한 그룹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생태와 환경 그리고 공동체 정신을 건축의 주요 화두로 삼았다. “돈도 되지 않고 폼도 나지 않는” 일이었지만, 공동체의 삶을 구현하려는 그의 시도는 곳곳에서 꽃을 피웠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의 공동주택 ‘소행주’와 등촌동의 다가구주택 ‘가가불이’는 그가 이루고 싶은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라는 뜻의 ‘소행주疏幸住’는 9가구가 7층 건물 한 채에 더불어 살며 한 가족처럼 지내는 공동체 주택이다. 현관과 현관 사이 복도 공간에 나무를 깔아 마루로 사용한다. 마루와 계단을 신발 없이 맨발로 다닌다. 옥상, 다락방, 책방, 작업실 등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주민들은 “사생활은 지키지만, 공동생활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어 좋다”라고 말한다. 유아들도 함께 키울 수 있어 맞벌이 젊은 부부가 안심하고 직장을 다닐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돕고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다. 이들은 자라서 훌륭한 시민으로 역할할 게 틀림없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국가의 희망이 될 터이다. 이 ‘소행주’ 공동주택 모델은 성미산 주변에만 예닐곱 군데 들어섰고 서울 중랑구와 강북구, 강서구, 경기도 부천과 과천을 비롯, 여러 곳에서 가지를 치고 있다.
‘가가불이家街不二’는 ‘집과 길이 둘이 아니다’라는 이름에서 보듯 44평의 좁은 땅에 집 두 채를 지어 가운데 공간을 정원으로 꾸몄다. 중정中庭을 두고 마주 선 두 채의 건물은 층마다 복도나 구름다리로 연결했다. 서재는 방과 분리해 옥상에 마련했다. 희한한 집이다. 동선이 길어 불편할 법도 한 집이다. 중정에 셋집을 더 늘리는 걸 포기하는 대신 햇볕과 바람과 전망을 얻었다. 옥상의 서재로 걸어가면서 하늘도 보고 달과 별도 본다. 그제야 비로소 건축가의 오묘한 의도를 눈치채고선 감탄한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소재 풀무학교의 요청을 받고는 농촌 가옥 마당에 회랑을 집어넣어 학교 도서관 겸 지역 사랑방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쫓아와 책을 펼치기도 하고, 어른들이 농사짓다가 흙 묻은 장화나 땀에 젖은 옷차림 그대로 들러 쉬거나 책을 읽는다. 도서관이 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부숴버렸다. 어른들이 아이들과 밝고 맑은 공간을 공유한다. ‘밝맑도서관’. 이일훈은 자신이 지은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건물의 개성을 한 마디로 드러내준다.
경기도 화성 팔탄면 ‘자비의 침묵 수도원’ 케이스가 재미있다. 이 수도원은 75cm 폭의 좁은 복도와 난간 없는 철제 계단으로 불편한 종교 건축물의 표본이 되었다. 신부와 수사들은 처음에는 불평했지만 좁은 복도를 지나다니며 형제애를 키웠고, 위험한 난간을 오르내리며 정신을 바짝 차리는 훈련을 하게 됐다. 그에게 깊은 감동을 준 프랑스의 롱샹Ronchamp 성당과 라투레트La Tourette 수도원이 오버랩된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의 1955년과 1957년 작품들이다. 침묵과 기도로 얻어지는 내적 기쁨을 구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가 깃든 공간이다. 이일훈은 두꺼운 벽을 뚫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목도하고 “펑펑 울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울음은 내면에 꽁꽁 숨겨두었던 슬픔이 어느 순간 무장해제당하면서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대개 어떤 대상의 따뜻함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이일훈은 폐쇄구조의 일반 성당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빛의 향연에서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건축에 숨결을 불어넣는 구조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가 이일훈의 경험을 통해 입증된 셈이다. 르 코르뷔지에를 현장 학습한 후 이일훈은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건축 방식에 몰입한다. 자신의 당호堂號도 ‘한지 두 벌 정도로 벽을 만든 공간’이라는 뜻의 ‘지벽간紙壁間’으로 삼았다.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마당과 별채를 두거나 복층이나 다락방, 옥상 정원과 누각을 만들고 싶기도 할 것이고, 서가가 회전하면서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나는 영화 장면처럼 엉뚱한 통로를 통해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두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기만의 집을 지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런 공간 욕구를 시현하고 싶은 마음에 들뜰 듯싶다. 건축가는 건축주가 어떤 삶의 방식을 집에 투영하고 싶은지를 먼저 파악한다. 이일훈 역시 “어떤 집을 짓느냐의 결정에 앞서 어떤 삶의 방식을 원하느냐가 먼저 확립돼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건축주의 의사를 존중하지만, 자기의 주관도 강해서 건축 과정에서는 늘 설명을 동원해야 했다.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제안하는 사람이 건축가”라고 자부하는 까닭이다. 의견 조율이 잘 되면 성사가 되지만, 건축주가 고집을 부리며 끝내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련 두지 않고 손을 뗐다. “건축은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는 평소 소신에 충실했던 까닭이었다. 건축주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수용했다. 자신의 건축사무소 이름 ‘후리逅理’도 “문득 진리를 만나고 싶다”라는 그의 소망을 담았다. 건축주와 조율이 잘 됐던 사례로 이일훈은 경기도 남양주에 지은 ‘잔서완석루’를 꼽았다. 국어 교사인 건축주와 끊임없이 이메일로 교신하며 완성한 집으로서 ‘이일훈 식 건축’의 전범으로 남았다. “구름배 같고 땅의 바람길을 아는 집”을 원하던 집주인은 소나무가 우거진 산자락에 나무와 흙으로 짓는 한옥을 계획했으나 “외양으로 전통을 계승하려 들지 말고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공간을 꾸미는 게 어떻겠느냐”라는 건축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일훈 선생님과 집을 짓고 싶습니다”로 시작된 82통의 이메일은 사람의 삶에 소통과 교감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알게 한다.
“집이 얼마만큼 불편해도 될까요. 불편하게 사는 것을 어디까지 참을 수 있으신가요.”
라는 건축가의 물음에 집주인은 이렇게 답한다.
“아마 제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다면 이런 것일 듯싶어요. 봄비가 오는 소리가 참 좋아서 잠에 빠지면서도 듣고 싶은데 창을 열 수 없을 때, 아아 신음하겠고요. 여름에 비가 와서 후텁지근할 때 창을 열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싶은데 비가 들이쳐서 답답할 때, 아아아 신음할 듯싶어요. 또 시간에 따라 변하는 자연 빛에 따라 책을 읽고 싶은데 빛이 얼마 없어 전깃불을 켜놓아야 하면 아쉽겠지요.”
이렇게 해서 한옥의 디테일을 내포하는 콘크리트 이층집이 지어졌다. 거푸집을 그대로 둔 거친 콘크리트 벽면에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라는 현판을 걸었다. ‘낡은 책이 있는 거친 돌집’이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오랜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와 서재의 이름으로 쓴 것인데 집주인이 이를 서각해 집 이름으로 삼았다. 추사가 남양주에서 계속 살고 있는 듯하다. ‘잔서’는 책을 좋아하는 주인을, ‘완석’은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축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일훈은 둘의 합작품인 이 집의 건축 과정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2012년에 집주인 송승훈 씨와 공저로 펴낸 에세이집 <내가 살고 싶은 집은>에 상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삶의 무늬들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고 김서령 작가가 2011년 이 집을 보고 쓴 인상 기를 보면 그 집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방과 방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구조다. 방이 서로 겹치지 않는 홑집 형태라 맞창을 낼 수 있고 문만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바깥 마루가 있어서 실내에서만 살지 않고 집 안이면서 바깥공기를 쐬는 공간이 있다. 잔디를 입히지 않은 맨 흙바닥인 마당이 있어서 식구들이 마루에 앉았다가 마당에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할 수 있다.”, “아래층은 거실이고 거실의 한 벽은 위가 트인 서재로 이곳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기도 하다. 집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비스듬히 걷게 되는 복도는 ‘책의 길’이다. 양쪽으로 서가를 짜 넣어 오가면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잡을 수 있다. 햇볕을 가려 어둑하고 편안하다. 덜렁 들린 누마루에 알맞게 경사가 져 여름 한낮 누워서 책읽기에 제격인 공간이다. 모서리를 꺾어 돌면 본격적인 서재가 나온다. 위는 돔형으로 검은 벽돌이 천체처럼 덮였고 양 벽면 가득 책이 꽂혔다. 집 내부는 달팽이처럼 나선형으로 휘돈다. 서재를 지나 직각으로 돌아가면 집주인의 방이다. 이 집에서 가장 깊숙한 지점이다. 맞은편으로 방금 지나온 책의 길이 보이고 안마당 위로는 사각 하늘이 뚫려있고 자그만 앞뜰에는 마가목이 심겨 있다.”(중앙일보, 2011.4.11.)
이일훈은 자기가 지은 집을 불쑥 찾곤 했다. 편하게 드나들면서 자신도 휴식을 취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보기 싫은 건물들 속에 둘러싸여 괴로움을 당하므로 한 번씩 건강한 집을 보면서 눈의 피로를 풀고 싶다”라는 게 방문의 변이었다. ‘안과 밖의 개념이 뚜렷하면서 소박하지만 당당한 집’이 이일훈이 생각하는 ‘건강한 집’이다. 집주인과 꽃과 나무 배치 등 공간 꾸미기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나누며 커피를 한잔 하고 나면 “며칠은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라고 말하곤 했다. 세상 어느 구석에는 언제든 찾아가 휴식할 수 있는 나의 창작 공간이 있다는 자부심이 건축가 이일훈에게 에너지를 주었을 것이다.
이일훈은 78년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평론가로 활동하다 80년대 중반 거장 김중업1922~88 선생의 눈에 띄어 건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김중업은 1952년부터 3년 반 동안 르 코르뷔지에의 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모더니즘 건축 스타일을 한국에 처음 도입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삼일빌딩, 예술의 전당 등이 그의 작품들이다. 김중업은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집이란 어드메 한 구석 붙잡고 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일훈은 스승의 가르침에서 집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깊은 성찰을 확인한다. 김중업에게서 건축을 배웠지만 “문하생일 뿐, 절대 제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김중업과의 대화에서 얻은 자각 때문이다. 스승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은 적이 있었다. “제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요?” 스승이 답했다. “스승을 밟고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라야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스승의 건축 언어를 이해하고 그 건축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 정도의 답변을 예상했던 제자는 의외의 답변에 놀라 그 이후 단 한 번도 “김중업의 제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 없었다. 스승보다 낫다는 생각은 범접할 수 없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일훈의 겸허함을 읽게 하는 일화이다.
그의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많았다. 건축만큼이나 사람과 술을 좋아한 까닭이었다. 술은 말술이어서 가히 ‘주해酒海’라 부를 만했다. 후배인 통영의 강제윤 시인은 “점심때 신촌서 만나 자정까지 마셨다”라고 회고한다. 사위인 경향신문 김형규 기자도 “장인과의 첫 만남에서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폭탄주만 열너댓 잔을 마셨다”라고 기억한다. 결혼식 때도 주례 대신 장인이 나서 “부부가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잘 싸우는 방법을 터득하라”고 일러주고는 자기의 술친구가 되어달라면서 “대리운전비는 평생 지급하겠다”고 공언해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필자가 오래전 어느 봄날 마포의 한 주막 집서 술잔을 기울이다 들려준 노래를 그는 좋아했다. ‘모란동백’이라는 노래였다. 시인 이제하1937~가 쓴 노랫말이 스산하게 가슴을 치는 곡이었다. 이제하가 원곡자이고 뒤이어 조영남이 불렀다. “조영남은 윤여정을 힘들게 했으므로 맘에 들지 않지만, 노래는 죄가 없다”라는데 우리는 의견을 같이 했다. 빈소에도 이 곡이 흘렀다.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면서 그를 추모한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이일훈의 시간은 이제 멈추었지만, 어떻게 그가 그리 쉽게 잊힐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지 않더라도 그는 기억될 것이다. ‘이일훈’이라는 브랜드에 담긴 건축 정신이 만만찮은 까닭이다. 묵묵히 자신의 ‘채나눔’ 철학을 건축에 투영한 그의 정신은 계속 전승되었으면 싶다. “비에 젖는 자는 소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며 획일적 매너리즘에 반기를 들고 자유자재를 견지하며 건축의 상품화에 저항했다. 집을 지으며 배려와 쓰임새를 고민한 그의 건축 정신은 개인을 너머 공동체의 삶을 지향한 표현이어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축가라는 직업을 혼자만의 삶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도구로 삼으려 한 점에서 그는 위대했다. 앞으로도 집을 볼 때마다 그의 이름 석자가 떠오를 것 같다.
건축가 이일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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