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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굿바이! 반포치킨 이정덕 사장 본문

굿바이! 반포치킨 이정덕 사장

gubo54 2022. 8. 13.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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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5km의 반포천을 따라 숲길이 조성된 건 2004년부터이다. 이 숲길은 깨끗해진 하천을 끼고 고속터미널까지 이어져 있어 서리풀 공원과 함께 서초구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숲길의 서쪽 끝은 이수 로터리이다. 배꽃 잎들이 떠 있는 하천이어서 이수梨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한강으로 흘러드는 위치여서 건너편 동작산 자락 정금마을 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던 나루터였다. 복개되기 전에는 4호선이 지나가는 동작역과 사당역까지 모두 물길이었다. 이 이수 로터리에서 구반포 쪽으로 걷다 보면 유명한 치킨집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반포주공 1단지에 도로를 따라 선형으로 배치한 노선 상가 속 반포치킨이다.

이 반포치킨은 마늘 치킨으로 유명하다. 이정덕 사장1948~은 친정에서 닭백숙에 마늘을 넣던 기억을 되살려 치킨에 응용해 반포치킨의 전설을 만들었다. 1976년부터였다. 당시 서울에는 명동의 영양치킨 집이 절대적 명성을 과시했다. 1960년에 개업한 영양치킨은 창업자 김태훈 씨가 외국의 치킨 바비큐를 보고 국내에 들여온 최초의 전기구이 통닭이었다. 닭을 찐 후 다시 튀기는 스코틀랜드 방식이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 프라이드치킨(KFC)을 탄생시켜 미국 국민음식의 자리를 꿰차고 있던 시기였다. 기존의 백숙이나 삼계탕과는 모양도 맛도 달랐던 까닭에 이 서구식 메뉴는 영양과 트렌드를 모두 잡음으로써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 트렌드에 후발주자로 이름을 올린 게 마늘치킨이었다. 으깬 마늘 3~4kg에 후추와 소금을 넣고 서너 시간씩 버무려 만든 소스를 닭고기 겉에 발라 전기 오븐에서 구워내는 방식이었다. 지금처럼 기름에 튀기는 프라이드치킨과는 맛에 차이가 있다. 세 대의 전기 오븐을 가동해 세 시간 동안 구워 기름을 빼낸 후 다시 마늘을 코팅해 굽기를 반복한다. 전기구이 시늉만 내며 1시간으로 끝내는 다른 집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닭도 크기가 작은 영계를 선택한다. 겉과 안이 골고루 구워지고 살이 퍽퍽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의 반영들이다. 중노동 탓에 오븐들은 그동안 무수히 수리를 받아야 했다. 주인만큼이나 역전의 용사들인 것이다. 6명의 종업원을 두어 오전 9시 반부터 낮 반 저녁 반으로 나눠 교대 근무를 하게 했다. 코로나 사태로 매출이 많이 줄었지만, 두 명만 쉬게 하고, 4명은 여전히 고용을 유지한다. 경영이 어려워졌지만, 오랜 동지 의식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 사장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반포치킨 테이블에 앉으면 무와 소금이 세팅된다. 마늘 맛을 내는 치킨 덕에 맥주를 곁들이는 풍속도가 자연스레 정착된 것이다. 치킨을 곁들여 맥주를 마시는 풍속도를 일컫는 치맥의 효시를 이룬 셈이다.  치맥은 종로 피맛골이나 명동 골목길에서 빈대떡이나 생선구이, 찌개류 안주에 대포라 부르던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이는 풍속이 대세를 이루던 가난한 문인들의 술상에 일대 변혁을 불러왔다.

시기적으로도 경제가 눈에 띄게 나아지던 70년 대 중후반이기도 했다. 맥주와 치킨이라는 주종과 안주가 성격상 영미문학 전공자인 문인들과 어울리는 점도 작용했다. 조병화, 황동규, 김현, 이청준, 황지우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렇게 반포치킨이라는 강남의 새 치킨집이 문인들의 방앗간이던 열차집, 남원집, 은성, 동방살롱, 아리스 다방, 탑골, 귀천 등 강북의 유서 깊은 노포들과 같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지리적인 원인도 작용했다. 반포치킨이 위치한 곳이 서울시의 확장 계획에 따라 새로이 뻗어가던 영동과 강남 그리고 사당동 일대의 갈래길에 위치한 까닭이었다. 반포나 잠원동, 남현동과 봉천동 일대에 살던 문인들이 삼거리인 이곳에서 목을 축인 뒤 헤어지기에 적당한 장소였던 것이다. 때맞춰 1974년에는 서울대 캠퍼스가 봉천동으로 옮겨 왔다. 서울대 교수들은 당시만 해도 불모지대(?)였던 한강 남쪽에서 유일하게 세련미를 자랑하던 이곳 구반포에 아지트를 마련했던 것이다. 구반포의 주공 아파트는 장관아파트라 부르던 고급 맨션이었고, 반포치킨은 그 맞은편에 자리 잡으면서 이른바 강남시대의 도래에 편승했다.

대표적으로 시인 황동규와 문학평론가 김현이 거론된다. 반포치킨 실내에서는 어디에 앉건 벽에 걸린 황동규 시인의 시 대설(大雪) - 김현에게와 마주하게 된다. 황동규1938~ 시인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관악구 남현동에 살고 있어서 강북에서 한강을 넘어오면 입구 격인 이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요즘과는 많이 다른 그 시절 시인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이곳 단골이던 두 문인이 생사를 격한 채 시 속에서 만나고 있다.

 

겨울하고도 흐린 날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고

눈송이 몇 공중에 날려놓고 바람만 불다 말다 하는 날

(중략)

오늘 양평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

찬 소주 대신

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 자주 들른 '반포 치킨'이건

(하략)

 

서울대 불문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서 한글로 평론을 쓴 제1세대임을 자부했던 김현1942~90은 구반포에 사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방앗간처럼 이 집을 드나들었다. 그는 마침내 반포치킨의 성자라는 별명까지 득했다.

 

이정덕 사장이 홀 입구 쪽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김현 씨는 늘 저 테이블 두 개를 합쳐 앉곤 했어요 아마도 일행이 몇이나 될지 몰라 인원수가 4명으로 제한되는 룸보다 바깥이 편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가 속했던 <문학과 지성사> 인물들도 김현을 따라 함께 단골이 되었다.

 

구반포 상가 맥주집 문을 열고 나와 잠수교 밑으로 내려가면 거기 바다, 바다가 있지...”

 

황지우1952~ 시인이 김현을 추모하는 시 '비로소 바다로 간 거북이'에 언급한 맥주집 역시 반포치킨이다.

1980년부터 구반포에 살았던 수필가 피천득1910~2007 선생도 자주 반포치킨을 찾곤 했다. 박용성 전 중앙대재단이사장은 80을 넘긴 지금도 가끔 이곳을 찾아 안부를 전하고 한다. 그들에게서는 오랜 지기로서의 정을 느낀다라고 이 사장은 소회를 밝힌다. 그들이 그렇게 반포치킨을 좋아한 데는 이 집의 뮤즈 이정덕 사장의 후덕함이 한몫을 했다. 그 후덕함은 가난한 문인들에게 외상 술을 준 데서 확인된다. 대폿집도 아닌 치킨집이었지만 가난했던 문인들은 외상 장부를 달아놓고 월급을 받거나 책이 출판되면 갚곤 했다. 50~60년 대도 아니고 70~80년 대에 외상은 일반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문인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지 않고서야 힘든 풍속도였다. 카드가 없던 시절이어서 교수 김현도 장부에 달아놓고 술을 마셨다. 이 사장은 당시의 장부를 골동품처럼 간직하고 있다. 오랜 고객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긴다. 가끔씩 그 장부를 들춰보며 주객이 모두 젊었던 옛날을 회상하곤 한다. 장부 속에는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외상 명세가 빼곡하게 기록돼있다. 한 시대의 명정酩酊 풍경으로 보존 가치가 높아 보인다. 나중에 누군가의 문학기념관이 들어선다면 꼭 비치되어야 할 목록이라고 여긴다. 김현은 간경화로 병석에 눕자 결국 술빚을 다 청산하지 못 한 채 세상을 하직했다.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는 평판을 얻던 김현이 별세하자 한겨레 신문의 고종석 기자는 한국 비평계가 쓸쓸해지겠다.”라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생전의 김현이 프랑스 작가 사르트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르트르가 갔다. , 이제는 프랑스 문화계도 약간은 쓸쓸하겠다.”라고 기고한 글을 오마주homage 한 것이었다.

 

연예인들을 포함한 많은 유명인들도 이 집을 좋아했다. 배우 김혜수, MC 신동엽, 탤런트 고 김주혁, 코미디언 김한국, 변호사 강용석, 아나운서 이지연, 문화대기자 오태진 등이다. 강용석 변호사는 <수요미식회>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연애 시절 서울대 불문과 출신인 아내와 이곳에서 데이트를 했던 추억을 언급하며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의 단골집이었다라는 아내의 말을 전했다. 이지연 아나운서는 반포치킨이 없어지면 저는 어떡해요?”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김현 사후 불문과 학생들은 김 교수의 발자취를 좇아 물어물어 찾아와선 그가 앉던 자리에 앉아 감상에 젖기도 했다.

이정덕 사장은 자주 주변 사람들을 끌고 오곤 했던 고 박옥출 서울대 불문과 교수 덕을 많이 봤다는 치사와 함께 차 사고로 고인이 된 김주혁 씨와 배우 김혜수 씨를 언급하며 김주혁 씨의 밝고 착한 심성과 김혜수 씨의 유쾌함을 떠올렸다. 창업 이래 한 번도 리모델링을 하지 않은 고색창연한 실내에 들어서면 시간이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까만 벽돌에 아치형 문을 한 세 개의 방이 왼쪽에 있고 오른쪽 공간에는 7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방은 반쯤 가려지는 구조여서 1930년 대 만주 봉천의 술집을 연상시킨다. 입구에서 세 번째 방은 배우 김혜수가 자주 앉던 방이어서 한때는 김혜수 방이라는 별칭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사업의 성공 이유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사장은 망설이지 않고 인덕이 컸어요라고 답했다. 어떤 사업이든지 사람의 조력은 필요하지만, 반포치킨의 경우는 그런 우연적 요소보다 필연적 요인들이 더 작동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반포치킨을 탄생시킨 이 사장의 남편은 동원여객이라는 운수업을 하다 접고선 치킨 사업에 눈을 돌렸다. 치킨이라는 트렌드와 마늘 전기구이 조리방식 그리고 강남의 초입이라는 위치 선정 등 세 가지 요인이 사업의 성공을 견인했을 것이다. 남편이 경영을 맡고 이 사장은 메뉴 개발과 조리를 맡았다. 치킨과 함께 선을 보인 삼계탕을 필두로 멕시칸 샐러드, 두부김치, 물만두, 참치김치찌개, 골뱅이무침, 한치구이, 황도복숭아 등 강북 노포들에 비해 세련된 안주들로 메뉴를 구성해나갔다. 지금은 19,000원이지만 창업 때 치킨 가격은 4백 원이었다. 지금은 하루 40 마리 정도를 팔지만, 한때는 200 마리도 부족할 정도로 성업을 이루었다. 삼계탕도 주종목으로 역할했다. 한동안 국물이 진국이라고 소문났던 메뉴이다. 곳곳에 삼계탕 집들이 생겨나면서 찾는 이가 줄어들자 하루 10 그릇 분만 준비했다. 이 집을 어렵게 찾아오는 일본인 관광객에 대한 배려였다. 코로나 상황인 지금은 사장되다시피 했지만, 올여름 복날에는 오랜 단골들을 위해 소량이나마 준비를 했다. 치킨과 함께 오랜 효자 노릇을 해 왔던 주역으로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겸한 우정 출연이었던 셈이다.

이 집의 치킨과 삼계탕은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가까운 흑석동의 중앙대학교에서 일어를 강의하던 최지은 씨가 입소문을 낸 덕이었다. 그의 소개로 국내 거주 일본인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고, 1986년부터 일본 미디어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일본 유수의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펴낸 만화 <아빠의 요리>에도 등장했다. 일본 언론에 수 없이 소개되면서 급기야 일본 관광객들이 현해탄을 건너와 줄을 섰다. 일본인들은 마늘 냄새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사장의 마늘 치킨에는 매료당했다. 독특함을 높이 산 까닭이었다. 그들을 서빙하기 위해 이 사장은 일본어를 공부해야 했다. 입구에 반포치킨임을 알리는 일어 표기도 기재했다. 한류가 퍼져나간 덕으로 중국, 홍콩, 대만, 동남아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집은 그 덕에 더욱 유명세를 탔다.

 

이 사장은 애써 언급을 피하지만, 필자의 기억에 이곳의 인기는 이 사장의 매력에 힘입은 바가 분명히 있었다. 단 한 번도 손님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문인들은 로맨틱 가이들답게 이 사장을 자기들의 뮤즈Muse로 여겼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이 사장의 미모는 빛을 발한다.

 

이 사장의 사업 감각과 음식 솜씨는 광장시장에서 원단을 취급하셨던 부친과 개성 출신으로 넉넉한 살림을 꾸리셨던 모친의 영향을 받았다. 35년 간 이 사업에 정성을 쏟은 덕분에 아들과 딸을 미국에서 공부시키고 그곳에 정착하게끔 뒷바라지할 수 있었다.

구반포 지역 재개발 사업에 따라 2022 3월이면 반포치킨도 소멸한다. 2019년 의지하던 남편도 세상을 떠나버려 이정덕 사장은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할 뜻이 없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거주했던 가게 뒤편의 아파트도 헐리게 돼 그녀는 지금 새 둥지를 어디에 틀까, 목하 고민 중이다. 누군가가 대를 이어 반포치킨을 계속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나만큼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나와 함께 퇴장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회상 속에서나마 반포치킨을 그리워해주지 않겠느냐?”라고 답한다. 전과 같지 않은 모습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두느니보다는 좋은 인상으로 소멸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 장군의 퇴임 연설을 떠올렸다. “Old soldiers neve die, but just fade away.” 역전의 노장 역시 사라짐으로써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 반포치킨은 숱한 일화들을 뒤로한 채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먼 훗날 고층 첨단 아파트가 숲을 이루게 될 이곳 주변 반포천 숲길을 걸으며 한때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치킨집이 있었음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상념에 다다르면 다소 쓸쓸해진다. “모든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라고 말들 하지만, 반포치킨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대상의 소멸은 어찌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줄 터이다. 가게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들도 함께 사라지는 까닭이다. 김영랑1903~50의 시가 옳았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나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우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또 한 차례 담담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과 악수할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반포치킨과 함께한 시간들이 바야흐로 역사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젊음도 멀어져 간다.

 

굿바이 반포치킨, 굿바이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