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천왕봉을 4백 번 오르다 - 최수덕 씨 본문

지리산은 해발 1915미터로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그리고 경상남도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 제1호(1967년 지정)로서 가장 규모가 큰 산이다. 흔히들 지리산을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산’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그 정상은 천왕봉이다. 필자는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다섯 번 올라가 봤는데 주위에 필자만큼 등정한 사람이 거의 없다. 그 다섯 번의 경력을 높이 사 주변 사람들이 길라잡이를 요청해오기도 한다. 그런데 무려 4백 번 오른 사람이 있다. 최수덕1954~ 씨이다. 그는 지리산 아래 산청이 고향이다. 거기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다. 지리산의 환경 속에 살지만, 산청 사람이라고 다 그처럼 열심히 지리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그는 마음이 동하면 언제라도 오른다. 계절과 날씨를 가리지 않는다. 그가 2백 번쯤 올랐을 때인 십여 년 전 함께 천왕봉을 오른 적이 있다. 필자의 친구와 초등학교 동창인 인연으로 지리산 가이드를 맡아 주었다. 노고단서 출발해 종주하는 코스였다. 2박 3일 간 걷는 코스였는데 곁에서 지켜본 그의 걸음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말로 나는 듯 걸었다. 170cm에 60kg의 날렵한 몸매여서 그럴 거라고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산청고등학교 시절 복싱을 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몸이 가볍고 다리 힘이 좋은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산청 쪽에서 바로 치고 올라가는 중산리 코스를 한 시간 반에 주파할 정도였다. 보통 네 시간 이상 걸리는 가파른 길이다. 60대 후반에 이른 지금은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세 시간에 걷는다. 성삼재서 중산리까지 산길 34km도 13시간 반에 주파하곤 했다. 무박 2일로 걷는 사람들도 따라잡지 못할 속도이다. 그 정도니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은 사람이다. 필자는 그런 그를 처음 보고선 ‘최 도사’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마치 경공법을 쓰는 도사처럼 몸이 가벼워 보였던 까닭이다. 그는 지난 53년 간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를 모두 답습한 덕분에 지리산의 전 코스를 손금 보듯 한다.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중산리 코스를 자주 택한다. 2016년에는 한 해에 53번을 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 꼴이었다. 이 해 마지막 천왕봉 등정은 한 해가 저무는 12월 29일에 이루어졌다. 모교인 산청초등학교 53회 졸업생들이 경향각지에서 모여 어릴 적을 추억하며 함께 오른 까닭이었다. 묘하게도 이 해 최 씨의 등정 횟수는 졸업 기수와 일치했다. 사흘 뒤인 2017년 1월 1일에도 오른 건 물론이다. 해마다 새해 첫 일출을 맞으러 오르는 까닭이다. 매번 그렇게 느끼겠지만, 특히 원단에 민족의 영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웅장하고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산을 오르는 데 남다른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는 까닭이 크겠지만, 보통 사람들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천왕봉 4백 회 등정을 달성했고 앞으로도 계속 오를 걸로 보면 그가 이렇게 열심인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지리산이 눈 앞에 있으니까요.”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이면 할 법한 답변이지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상에 대한 성실한 관조의 힘으로 지극한 경외심을 갖추는 류임을 필자는 경험으로 안다. 관조가 들어 삶이 외연을 확장하고 경외심이 작용하면서 한 인간의 인격적 성장을 돕는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른 영국의 등산가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 1886~1924)가 이 표현의 원조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산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산은 유혹적 존재이다. 오르기 힘든 산일수록 그 유혹의 강도는 커진다. 그 산이 위안을 준다는 사실은 산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라야만 확인할 수 있다. 천왕봉을 수백 번 오른 최수덕 씨는 당연히 “지리산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고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산이 방학 때의 놀이터였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다양한 의미로 다가왔다. 희로애락의 매 순간마다 찾기 버릇하다 보니 지리산은 어느새 친구이자 연인이면서 스승의 모습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특히 좋아하던 복싱을 부모님들이 결사반대하시면서 어린 나이에 속앓이를 많이 했다. 그 여파로 사고를 자주 쳤고, 급기야 퇴학을 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체육관을 전전했으나 스파링 상대로만 써먹을 뿐, 키워주려는 곳은 없어 번번이 절망에 빠졌다. 실력은 늘고 있었지만 여전히 체육관 지킴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잘리고 꿈도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면 울고 싶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질풍노도처럼 분노와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도망치듯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달랬다. 그의 마음고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8살에 자원입대한 해병대에서도 좌충우돌하면서 퇴교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고향에 돌아와 있으면서 다시 산에 올랐다.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고 힘든 시간을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했던 시절의 청년에게 지리산은 큰 위안이 되었다.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산의 너른 품에 안기면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얻어서는 산을 내려와 다시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그가 지리산을 “평생의 교육원”으로 여기는 데는 강렬했던 추억 하나가 그 배경에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혼자 천왕봉에 올랐다가 태풍을 만나 하산을 못한 채 발이 묶이게 되었다. 당시 천왕봉에는 지붕과 기둥밖에 남아있지 않은 정자가 있었으나 태풍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년의 무모한 열정은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젖은 몸으로 한참을 떨고 있는데 청년 다섯 명이 나타났다. 전주에서 산행 온 그들의 도움으로 불을 피우고 밥을 해 추위와 허기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정자 바닥이 따뜻해지자 두 명씩 돌아가며 서로 등을 기대고선 쪽잠을 자고 나머지는 불침번을 섰다. 날이 밝자 고마움을 표하고 그들과 헤어져 중봉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큰 비 탓에 길이 유실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 조개골로 빠졌는데 화전민이 사는 오지였다. 할머니 두 명이 감자를 손질하고 있다가 군복 차림의 그를 보고선 안으로 숨어버렸다. 배고픔을 못 이겨 문안에다 대고 먹을 걸 좀 달라고 애원하자 할머니가 감자 몇 알을 주고선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공비인 줄 안 것이었다. 이틀에 걸쳐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 산행의 인상은 강렬했다. 준비 없이 오르면서 겪은 변수와 엄한 산의 가르침, 경각에 이르렀던 목숨, 기적처럼 나타나 자기를 살려준 사람들의 따스함 그리고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세상의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인식들이 일거에 몰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학습 내용들이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천왕봉에 선 그에게 습관처럼 자문자답을 하게 만든다.
“나는 제대로 준비된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법정 스님은 열반에 들기 직전인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가진 마지막 법문에서 대중에게 당부하셨다.
“꽃이나 잎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멀리 씨앗을 날려 보내고 깊게 뿌리를 내리며 발아할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은 봄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내 삶에 봄을 피우려면 끝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문해야 한다.
“나는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인생의 봄을 위해 준비하려 했던 많은 선인들이 있었다. 5백여 년 전 함양 살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72) 선생도 그랬다. 그 역시 ‘지리산이 눈 앞에 있어 오른’ 사람이었다. 정계에 나섰다가 두 차례나 선비들의 정권 쟁탈전이던 사화士禍를 경험하고선 낙향해 산천재에 칩거하며 ‘산림처사山林處士’를 자처했다. 산천재에서는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바라다 보인다. 시야에 들어오니 지식인으로서 가보지 않고는 그 호기심을 배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12회에 걸친 천왕봉 등정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남명은 지리산을 중국의 두륜산頭輪山에 비기며 그 장중함을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산”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한 바 있다. 58세까지 올랐고 보면, 길이 없어 접근이 어렵고 등산 장비가 없던 시절에 대단한 열정이라 평가할 만하다. 그는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지리산 기행문에 등반의 의미를 남겼다.
“물을 보고 산을 보면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
높이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다. 사고의 위치를 이름이다. 생각하는 위치에 따라 사물과 사리는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달리 ‘지리산智異山’이 아닌 것이다. 일반적인 것이 아닌 색다름을 알게(智異) 된다. 그는 천왕봉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세 명의 군자들을 떠올렸다. 한유한韓惟漢, 정여창鄭汝昌, 조지서趙之瑞였다. 고려 중기와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청렴한 선비의 표상들이었다. 고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실로 중한 것과 그저 하찮은 것들을 식별할 줄 알 게 되었을 것이다. 세 학자들은 모두 남명처럼 악양(岳陽, 지리산)에 은거한 공통점이 있다. 책이 아니라 산이 그들에게 더 큰 깨달음을 주었을 터이다. 여러 차례 발품을 팔아 천왕봉을 오른 이들에게서는 책상받이가 아니라 실천적 지식인이고자 했던 실학자의 면모를 읽게 된다.

지리산은 삼한 시대 마한 군에게 쫓기던 진한의 왕이 성이 다른 세 명의 장수에게 지키게 한 성삼재와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의 모친 선도성모를 기려 제사를 지낸 노고단을 둔 민족의 영산이다. “사람이 지나면 신선이 되고, 신선이 통과하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통천문通天門도 있다. 천왕봉 표지석에 쓰인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영산의 승천 기운을 담고 있다. 신라시대 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 857~908)을 필두로 많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은 70여 편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은 민족의 학교인 셈이다.
최수덕 씨는 지리산 외에도 덕유산, 설악산, 민주지산 등 명산들을 찾아다닌다. 그런 와중에도 지리산을 수백 번 올랐을 정도로 그는 지리산 마니아이다. 1967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형을 따라나선 게 천왕봉과의 첫 만남이었다. 동행했던 친구 둘은 힘에 겨워 중간에서 포기했지만, 최 씨는 정상까지 올랐다. 그 후로 50여 년 동안 봄의 철쭉,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새해의 일출들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가득 마음에 담았다. 그런 단편들이 지리산의 이미지가 되어 심상에 맺혔을 것이다. 그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지리산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지리산은 좋은 것만 베풀어주지, 사람처럼 상처 주거나 뭘 요구하거나 그러지 않지요”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따스한 온정의 가치를 절절히 안다. 겨울비 내리는 날 멀리서 바라다보는 주황색의 등불을 못내 그리워해 본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리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두 사람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지리산이 특별한 존재 이도록 계기를 제공한 분들이었다. 우천宇天 허만수(1916~76) 선생이 최초였다. 지금은 지도와 이정표가 곳곳에 설치돼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지리산은 조금만 들어가도 길을 잃거나 진로를 찾지 못해 낭패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70년대에도 유난히 조난사고가 많았던 산이었다. 특히 큰 비가 내리고 나면 길이 유실돼 사고를 키웠다. 오늘날의 지리산 등산 코스를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우천 선생이었다. 그는 등산로를 직접 개척하고 지도를 그려 보급했다. 국립공원은 허 씨의 지도를 참고해 탐방로를 닦고 이정표를 세웠다. 진주 출신으로 일본 유학 시절의 산악반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산을 지켰던 사람이다. 29살에 일본서 진주로 돌아왔고, 33살부터는 천왕봉 옆 세석평전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샘터 근처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곳에서 조난객들을 구하며 자연인처럼, 기인처럼 살다가 76년 이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최수덕 씨는 중학생 때 지리산에 올랐다가 허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허 씨는 소년이 길을 잃을 것을 염려했던지 자신이 그린 지도 한 장을 건네줬는데 최 씨는 그 지도를 소중히 간직하며 오래도록 등반의 길잡이로 삼았다고 회고한다. 지리산 최초의 등산 지도였던 셈이다. 1980년 최 씨와 지리산 산악인들이 중산리 법계교 옆에 ‘지리산 산신령’이던 우천의 비석을 세워 그를 추모했다.
또 다른 계기의 주인공 역시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용해 강민 선생이었다. 1973년 법계사에 침을 놓는 용해 선생이 찾아들면서 근동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침은 신통해서 업혀 올라간 사람이 침을 맞고서는 제 발로 걸어 내려올 정도였다. 비선대 쪽 토굴에서 독학으로 중국 궁중 의술을 공부하다 서울 본가에 전화를 하기 위해 천왕봉을 넘어 중산리 이장 집에 다니러 왔다가 가을비 탓에 미끄러워진 길에서 낙상을 당한 진주농대생과 조우하게 되었다. 휴대하고 다니던 침을 놓아 통증을 없앤 후 팔을 제 자리에 끼워 넣어준 게 인연이 돼 법계사 쪽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최수덕 씨는 소문을 듣자마자 그의 거소로 찾아가 침 맞으러 오는 환자들 짐을 나르며 그를 도왔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법계사를 오르내렸다. 산에서의 생활이 집보다 편했던 연유도 작용했다. 한동안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이 이색 경험 덕에 최 씨는 지리산을 더욱 각별히 여기게 되었다. 용해 선생은 그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뒷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지리산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우천과 용해, 두 선생의 뒤를 지금은 최수덕 씨가 잇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는 지리산을 아끼고 보존하고 싶어 한다.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이에게도 지리산이 고마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그와 산청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어떤 의미일까.
“지리산 자락의 젊은이는 성인식처럼 천왕봉에 올라야 남자로 인정받았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자니 아프리카의 마사이 부족이 생각났다. 마사이족은 ‘모란moran’이라는 전사가 되기 위해 사자와 대결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부족을 지킬 전사로서의 역량과 용기를 테스트하는 과정인 것이다. 마사이 소년들이 밤을 새워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50km의 들판을 왕복하며 담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창과 칼, 돌팔매를 이용해 사자를 죽이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처럼, 지리산 소년들도 빈약한 등산 장비만으로 천왕봉을 오르는 통과의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몸과 마음이 괴롭고 지칠 때 그냥 지리산에 오르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다 풀려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오곤 하죠.”
지리산은 지금껏 그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 치유의 산이기도 하다. 한 번은 지리산에서 가장 힘들다는 코스인 남원 인월에서 산청 시천 간 일명 태극종주 구간 100km를 3박 4일간 탔는데 ‘쓰스가무시’에 감염된 몸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았다고 회고한다.
최 씨는 사회에 나온 이후에도 고향에 남아 산림 사업을 하며 지리산을 떠나지 않고 그 품에서 살고 있다. 34살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마쳐 “부모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고교 졸업자’가 되었다.
진정한 산악인들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등산登山’이라 하지 않고 ‘입산入山’이라 부른다. ‘산을 인간의 정복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조물주의 품 안으로 들어가 안긴다’는 의미에서이다. 등산이 운동이라면 입산은 수양의 과정이다. 지리산 자락 68세의 최수덕 씨는 오늘도 지리산 입산을 준비하고 있을 터이다. 그 속에서 자연과 동화되는 기쁨을 누리고자 함일 것이다. 최수덕 씨에게 천왕봉 등정은 희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성스러운 작업이 될 터이다. 그에게서는 내려놓고 비워내며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픈” 겸허한 사람의 향기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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