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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풍경의 언어를 읽다

최승희를 잇는 탈북 무용수 최신아 씨 본문

최승희를 잇는 탈북 무용수 최신아 씨

gubo54 2022. 8. 1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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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무용수 최신아(1969~) 씨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경기도 덕소의 한 공연장에서였다. 가곡 <비목>의 노랫말을 쓴 한명희 선생이 집 뜰에서 연 가을 가곡 잔치 자리였다. 뒤풀이 자리에서 한 테이블에 앉게 돼 최 씨가 북한에서 날리던 무용가였으며 그 유명한 최승희 선생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망명한 무용수인 데다 최승희의 춤을 춘다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그날 동석자들끼리 최 씨의 무용연구소 가까운 당산역 근처의 매운탕 집에서 모여 점심을 함께 했다. 최 씨는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섰는데 나중에 밥값을 내고 간 걸 알게 되어 매우 당황했었다. 필자는 북에서 탈출해 남한 사회에 정착한 사람이니 만큼 당연히 대접할 생각이었는데 거꾸로 돼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한 채이다. 짐작컨대 남에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강인한 성격이 작용한 게 아닐까 여길뿐이다.

 

2019년 가을에 최 씨의 초대로 예술의 전당 국악당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공연을 보았다. 묘하고 생소했다. 지금껏 본 우리 무용과는 동작이 많이 달랐다. 2020년 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접했다. 역시 움직임이 많고 속도감이 있었다. ‘쟁강춤이라고 했다.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손에 부채를 들고, 손목에는 방울을 달아 '쟁강쟁강' 소리가 나도록 춘다 해서 쟁강춤이라는 설명이다. 최승희의 무희춤으로부터 이어져온 춤이라고 한다. 보통 10명이 추는 군무群舞인데 빠르고 절도 있는 그녀의 동작 덕에 혼자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쉰의 나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역동적이었다. “춤 동작에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평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녀의 설명으로는, 서구식의 발레나 현대 무용이 활발한 남쪽과 달리 북에서는 전통 무용에 주력한다. 살풀이와 태평무 등 전통무용가락을 춤의 기본 동작으로 삼아 연습한다. ‘신무용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최승희의 춤을 계승하는 것이다. 최신아 씨 역시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최승희로부터 직접 배운 제자의 제자이다. 계보로 보면, 2대 제자에 속한다.

최승희(崔承喜, 1911~69)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영화제작자이던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65월 도일해 3년간 지도를 받았다. 귀국해 1930 2월 경성공회당에서 가진 무용발표회는 한국인 최초의 공연이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공연에서 일본 춤이라는 비판을 받자 그녀는 바로 조선 춤의 일인자이던 한성준의 문하로 들어가 우리 전통 춤을 학습한다. 이 때 배운 장구춤이 최승희의 브랜드로 태어난다. 장구를 메고 가락에 맞춰 역동적인 춤사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오른손에만 채를 들고 왼손은 빈손으로 춤사위를 추는 최승희 류 장구춤이 탄생한 것이다. 최승희는 1935년에서 3년 동안 일본과 미국의 도시들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쳐 가는 곳마다 큰 화제를 낳았다. 문학 청년 안막과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다. 사회주의자로서 남로당 계열이던 남편 안막이 숙청당하자 최승희도 함께 숙청되면서 1969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1980년대에 복권됐다. 반동분자에서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 ‘조선의 3대 여걸로 재평가받았다. 그녀의 춤이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이다.(이충열,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참조) 그런 최승희의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던 지라 전설을 승계한 제자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최승희 류의 장고춤을 추는 최신아 씨

 

최신아 씨의 이력이 궁금해 묻게 됐다. 필자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재를 떠올렸다. 평양의 예술인 가정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최 씨는 북한에서는 유명한 무용가였다. 1981년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평양학생소년궁전의 가야금 소조에 들어갔지만, 무용이 멋져 보여 담임 선생을 졸라 무용 소조로 옮겼다. 예술영화촬영소 간부로서 최승희와 함께 활동했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작용했을 것이다. 최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애틋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더 찾아 어머니의 질투를 샀을 정도였다. 체구가 컸던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고 좋았다고 회상한다.

 

1982년 최 씨네는 함경북도 청진으로 추방된다. 둘째 오빠가 패싸움에 여러 차례 가담하면서 물의를 일으키자 당이 추방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 오빠는 천주교에도 심취했을 정도로 북한 체제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 최 씨도 좋아하고 따랐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니 19세기 후반에 조선이 금기시하던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 겹쳐진다. 엄혹한 체제 하에서도 삶의 진리를 찾으려 했던 동류의 사람들인 까닭이다. 최 씨는 평양에서의 이력을 인정받아 청진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무용의 길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최 씨에게 전화위복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 학교에서 최승희의 제자인 김응범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루 8시간 이상의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 덕분에 최 씨는 솔로 무대에서 15년 동안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김일성, 김정일 앞에서 수 차례 공연을 했을 정도였다. 열일곱 살 되던 해부터 함경북도예술단 무용수로 임명됐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표준 동작을 선보여 무용계의 교과서로 통했다. 최 씨는 신인들을 가르치는 역할도 맡았다. 예술감급 무용수를 거쳐 무용 감독을 16년간 역임하는 등 도합 26년을 활동했다. 1993 전승 40 돌 행사에서는 <기러기떼 나르네> 공연의 무용 보조감독을 맡았다. ‘아리랑 대집단체조(매스게임)’의 원조 격이었다. 북한에서 그 정도로 인정받는 예술가였다.

 

그녀는 2011년 연변에서 한국으로 망명한다. 필자는 40여 년을 유명 예술인으로 살아온 체제에서 기득권과 가족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체제로 옮기는 데 얼마나 큰 심적 갈등이 따랐을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냐는 물음에 최 씨는 이렇게 답했다.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갈구가 가장 큰 탈북 동기였다는 것이다. 2006년 처음 중국 연변의 외숙부 댁에 들렀다가 중국의 개방 사회 모습을 목도하고선 마음이 흔들렸다. 남편과 헤어져 살던 2008년에는 장기 체류하며 돈벌이를 할 생각에 다시 연변으로 나갔다. 한 동포 집의 어린애를 돌보는 가사도우미 자리를 얻었는데 이때 인터넷을 처음 접했다. 그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를 보고선 경이로움을 느꼈다. 무용인답게 유명 가수들의 공연 때 뒤에서 춤을 추는 백댄서들에게 시선이 갔다. 그들의 안무를 보고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너무나 다른 동작이었던 까닭이었다. “저러다 목이 빠지지 않나?” 걱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춤의 차이가 아니라 체제의 차이를 본 순간이었다. 심적 동요가 크게 일었다. 어느날엔 평양예술단의 서울 공연도 보았다. 처음에는 진짜 북한예술단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 만든 예술단이었다. 그 순간 최 씨는 남한에 가서 진짜 최승희 무용을 보여주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북한에서 예술가는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늘 답답한 응어리로 가슴 속에 있던 차였다. 자기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완성하며 아이들과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나가 일하던 그 집 아이의 아버지가 결심을 도왔다. 통화할 때마다 한국 사회에 대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6개월만 돈을 벌어서는 청진으로 돌아가려던 그녀의 계획은 어긋나 3년을 연변에서 머무르게 된다. 2011 9월 장기체류자로 신분이 노출되자 위기를 직감한 최 씨는 돌보던 아이 아버지의 주선으로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결행한다. 다른 일행 3명과 함께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남쪽 국경으로 가서 다시 육로를 이용해 태국으로 밀입국하는 코스를 거쳤다. 힘든 여정이었다. 기차에서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서는 6시간 걸려 산을 넘었다. 메콩강을 따라 이동하며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긴 끝에 태국 경찰에 인계됨으로써 한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 정착하면서 최 씨는 자신을 도와준 그 동포와 재혼해 가정을 꾸렸다.

 

최신아 씨의 강인함은 두고온 딸을 빼내온 데서도 확인된다. 탈출한 지 3년만에 브로커를 통해 첫째 딸 데려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짐작하는지라 최 씨의 집념이 남다르게 전해온다. 그렇게 데려온 강나라1997~는 지금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KBS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자문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드라마에 묘사된 북한 실정과 북한 주민의 사고, 옷차림, 생활 등이 강나라 씨의 손을 거쳐 태어났다. 모녀는 시간이 나면 딸의 운전으로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하고 쇼핑도 한다. 최 씨는 십자수 놓는 게 유일한 취미였지만, 뒤늦게 쇼핑에 관심이 생겼다. 자유세계 생활을 만끽하는 젊은 딸과 행복한 시간을 공유하고픈 마음이 생겨난 까닭이다. 딸은 최근 유튜브 활동을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문신을 하고서는 엄마를 놀래키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모녀는 세대차로 티격태격하다 함께 깔깔 웃기도 하며 마치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는 다정함을 보인다. 최 씨에게 북에 두고온 둘째 딸은 마음의 그늘이다. 언젠가는 꼭 데려오고 싶다고 염원한다.

 

 

 

남한에 와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지 물었다. 탈북민 4명 가운데 1명 꼴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예상대로 자유 세계에서 마음껏 예술을 펼치고 싶어서 월남했으나 정착이 쉽지 않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나와 무용을 하려고 했지만, 환경도 낯설고 아는 이도 없는 데다 45세의 나이여서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밥벌이는 해야겠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3년 동안은 무용을 포기하고 지냈다. 한동안 식당일을 하며 부업으로 십자수 놓는 일을 병행하던 그녀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은 다름아닌 아리랑이었다. 2015 8월 광복 70주년 기념 ‘2015 국민대통합 아리랑 전국순회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원 샷 원 킬One Shot One Kill’. 최 씨는 처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멋지게 과녁에 명중시켰다. 제대로 존재감을 알린 것이다. 그녀를 구원한 것이 아리랑이었다는 점은 아리랑 정서가 남과 북을 아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무대에서 그녀는 최승희의 장고춤을 처음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객석에서 앙코르가 빗발쳤을 정도였다. 남한 관객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신선하고 역동적인 춤이었던 까닭이었다. 곧 이어 남원 패션쇼의 안무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녀의 천부적인 실력 덕이었다.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2015 11월에는 최신아 예술단도 창단했다. ‘최신아 예술단이 선보인 레퍼토리 가운데 정수라의 히트곡 ! 대한민국을 춤으로 창작한 공연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남한의 신나는 노래와 북한의 역동적인 춤사위가 콜라보를 이룬 것이다. 특히 4계절을 표현하기 위해 순식간에 옷 색깔과 옷 모양을 바꾸는 변검變臉 식 기술이 눈길을 끌었다. 북한 인공기 이미지의 옷에 태극기를 흔드는 해프닝도 이채로움을 더했다. TV조선의 <모란봉 클럽>에 출연해 이 춤을 추자 폭발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가르치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경력이다 보니 최신아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2021 5 1일 영등포에서 봉천동으로 옮긴 무용연구소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무용을 비롯해 예술의 기본을 배우고 있다. 한국인을 비롯해 중국인, 조선족 동포, 일본인, 캐나다인 등이다. 외국인에게 조선춤을 가르치기가 어렵지 않을까 여겼으나 비책이 있었다. 다름아닌 자모식 무용표기법이었다. 1987년에 북한에서 만든 무용 교육법이다. 이 표기법을 익히면 누구라도 똑같은 춤동작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모식 표기법은 전통무용을 기본으로 하고 현대무용과 발레를 동시에 1전공으로 가르친다. 거기에 음악의 청음, 장단, 악보까지 모두 기본으로 교육한다. 이곳에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웠던 이도 있고 살풀이 이수자도 있다. 초등부 학생들과 성인반도 있다. 여러 가지 조건 탓으로 꿈을 접어야 했던 사람들을 위한 취미반도 운영한다. 무용단 단원들뿐 아니라 연습생들의 의상과 소도구들도 최 씨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어준다. 남한에는 없던 유형의 무용이다 보니 최 단장 이외에는 그 감각을 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최신아 무용연구소

 

최신아 씨가 보기에 남북 무용의 차이는 기후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추운 북에서는 동작이 빠르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고 따뜻한 남에서는 단아하고 부드러운 동작을 보인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관점이었다.

사당춤이나 쟁강춤, 장고춤 등 전통무용을 배울 때는 최승희의 동작과 표정을 세세하게 지도받았다. 최신아 씨의 춤을 볼 때마다 필자는 그 위로 이 땅에 색다른 춤의 매력을 선보였던 조선 무용의 선구자 최승희를 오버랩해서 보게 된다. 최승희의 또 다른 분신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최승희 류 쟁강춤 최신아

최신아 씨는 2018년 말 최승희의 평양장고춤 이북5도 무형 문화재로 신청했다. 코로나로 심사가 밀려 결정이 늦어지고 있어 최 씨는 조바심을 낸다. 결정이 되면 북한의 오리지널 춤이 남한의 문화재가 되는 역사를 쓰게된다. 최 씨는 제가 추긴하지만 전설이신 최승희의 춤을 계속 보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죠.”라고 강조한다. ‘쟁강춤도 무형문화재로 등록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통일에 대비해 한반도 문화유산 지킴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녀는 2020년 통일자문위원에도 위촉됐다.

 

2018 2월 서울 국립극장에서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을 지켜보면서 최신아 씨는 남북 예술가가 같이 한 무대에 오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에 울컥했다고 회고한다. 최 씨는 연구소를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만드는 것이 꿈이다. “어디가 됐건, 최승희 선생님 춤은 통할 것이라면서 그렇게 춤으로 세계와 교감해나가고 싶어요.”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무용만 할 수 있으면 행복해요.”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요즘 정말 행복해 보인다.

 

2 10일 설 전날, 최신아 씨가 명절 인사로 자신이 운영하는 <최신아 TV> 동영상을 보내왔다. 연습실에서 문하생들과 함께 부채춤을 추는 장면 위로 자막을 넣은 것이었다. 고향은 멀고 멀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하면 그곳이 고향입니다. 따스하게 품어주고 서로 아끼며 새해에도 멋지게 파이팅했으면 합니다.”

 

훈풍이 불면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임진강변으로 초대해 매운탕을 들며 그녀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북과 남, 분단 조국을 모두 아우른 이 춤의 전령은 아직 못 다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터이다.